사실 존 매케인은 늘 품격있는 캠페인을 원해왔다. 서로에 대한 기본 예의가 필요한 타운홀 미팅식의 토론도 그래서 좋아한다. 정책과 이슈에 대해선 한치의 양보없이 공격하다가도 토론이 끝나면 두 후보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의 캠페인을 오랫동안 구상해 왔다. 진흙밭의 개싸움 같은 저급한 선거전의 상처를 그 자신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케인, 네거티브 TV선전 중단 선언 · 상대에게도 중단 촉구” - 실제 2000년 공화당 대선경선 중 미디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혼외정사, 정신불안, 동성애, 아내의 마약중독에서 흑인 사생아에 이르기까지 온갖 끔찍한 흑색선전에 시달리던 매케인이 상대후보 조지 부시진영에 휴전을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뼈아팠다. 인신공격을 한층 더 강화한 부시는 승리했고 ‘보다 긍정적 캠페인’을 역설한 매케인은 패배했다.
아마도 지난 주말부터 매케인이 새삼 떠올린 것은 2000년의 교훈인 듯하다. 지난 4월만 해도 그는 버락 오바마를 제레마이어 라이트 목사와 연관시켜 공격하는 공화당인사들에게 당당하지 못한 전략이라고 비난했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오바마 인신공격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나섰다. 아직은 그 자신이 아닌 용맹스런 무스 사냥꾼 새라 페일린를 저격수로 내세우는 한편 TV광고로 반응을 지켜보는 단계다.
‘글러브를 벗어던지고’ 한판 싸움에 뛰어든 페일린은 오바마가 “테러리스트들과 어울리고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오바마가 어린아이였던 1960년대 과격반전단체 리더였던 빌 에어스는 지금은 일리노이주 주립대학에서 존경받는 교육학 교수다. 한동네에 살았던 당시 그와 친분을 유지한 것으로 오바마가 테러리스트와 공감한다고는 아마 매케인 자신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시작된 네거티브전에 최종 OK사인을 내준 것은 매케인이다. 월스트릿만이 아니라 매케인 캠페인에도 쓰나미로 몰아닥친 경제위기에 대항하는 필사의 전략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부시의 그늘에서 벗어날 길 없는 경제이슈를 피해가자니 오바마 인신공격이라는 선정적 소재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번 주 초 나온 첫 반응은 좋지 못했다. 유권자 쪽에서 보면 무반응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도대체 진짜 오바마는 누구입니까? 그는 위험하고, 미숙하고, 미국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도저히 대통령감이 못됩니다”라며 불가해한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TV 광고도 유권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하긴 직장을 잃을까봐, 주택을 잃을까봐, 은퇴자금이 다 날아 갈까봐 공포에 사로잡힌 유권자들에게 오바마의 과거 교분관계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유권자들은 무관심했지만 언론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진보·보수 양진영의 모든 미디어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진흙탕 싸움을 벌리느냐고 개탄했다. 인신공격은 평시에도 삼가야할 악습이지만 온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이 위기의 시대에는 특히 더 유권자의 분노를 불러올 무책임한 행위라고 질타하고 나섰다.
그래서였을까, 7일밤 2차 토론에선 빌 에어스는 등장하지 않았다. 답변마다 오바마에 대한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으려는 매케인의 분투는 역력했으나 인신공격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오바마의 침착하고 논리정연한 답변이 ‘대통령다웠다’는 평가를 얻어냈지만 매케인도 크게 뒤지지는 않았다.
사실 어느 후보도 유권자들이 정말 듣기 원했던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불안을 걷어내는 희망을 심어주지는 못했다. 그나마 새롭다면 매케인이 내놓은 불량주택모기지 정부 구제안 정도일까, 나머지는 지난 몇 달 동안 계속 들어서 이젠 거의 외울 정도가 되어버린 공약의 되풀이였다. 위기의 한 복판에서 위기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토론은 캠페인의 변수가 되기 힘들다는 의미다.
토론을 마친 존 매케인 팀은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가라오께를 하며 비 내리는 내슈빌의 새벽을 지켜보았다. 물론 흥에 겨워 축하노래를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실망과 좌절을 씻느라 목청을 뽑은 것도 아니었다. 미디어마다 오바마의 토론 승리를 전하고 있지만 이날 토론은 기본 판세에 별 영향을 못 끼친 것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표정의 한 매케인 참모는 “우린 전에도 죽어본 적이 있으니까요”라고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대책이 있습니까? “또 죽을 수는 없지요”
‘또 죽을 수 없는’ 매케인 진영은 토론 다음날 아침부터 다시 오바마를 향한 포문을 열었다. 전국에 방영된 TV 광고를 통해 “진짜 오바마는 누구입니까”라고 외치고 있다. 그 화면 어딘가에 언뜻 곤혹스런 매케인의 두 얼굴이 투영되어 보인다. 오바마는 유세지에서 여유있게 응수했다. “난 매케인의 공격쯤 4주 더 견딜 수 있어요. 그러나 미국이 매케인의 부시정책을 4년 더 견딜 수는 없습니다”
선거전을 지배하는 금융위기는 쉽게 물러갈 기세가 아니다. 포괄적이고 획기적인 경제대책을 제시할 수 있다면 모를까, 판세는 현 집권 공화당의 후보인 매케인에겐 도저히 손쓰기 힘든 상황으로 질주할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거론하지 않고 있는, 그러나 마음속으론 카운트하는 요소가 하나 더 남기는 했다. ‘인종’이다. 그러나 인종을 주요 변수로 거론 하기는 아직 이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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