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로 보아도 로이드 벤슨 연방 상원의원은 컬러플한 스타는 아니었다. 1988년 마이클 두카키스 민주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나선 67세의 그는 경륜은 풍부하지만 무미건조한 정치가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한차례의 부통령후보 토론은 그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꾸어 놓았다.
상대는 아버지 부시의 러닝메이트 댄 퀘일, 같은 연방 상원의원으로 깔끔한 외모의 퀘일은 41세 젊은 후보였다. 퀘일이 자신의 경험부족을 존 F. 케네디에 비유했을 때 벤슨은 경멸에 찬 어조로 쏘아댔다. “이봐, 상원의원, 난 케네디와 함께 일했어. 케네디를 잘 알지. 케네디는 내 친구였거든, 그런데, 상원의원, 당신은 케네디가 아니야” - 대선후보 토론 사상 최고의 강펀치가 날려진 순간 청중들은 (속된 표현이지만) 뒤집어졌고, 한밤중 자동차 불빛 속에 드러난 사슴처럼 혼이 나간 퀘일의 당황한 모습은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미 정치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 이 강력한 한방도 승리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이후 벤슨은 유세장의 투사로 인기를 모았으나 백악관에 입성한 것은 짝퉁 케네디 팀이었다. 더구나 요즘 선거에선, 특히 오늘 부통령 후보 토론에선 벤슨식 극단적 대응은 절대 기피사항에 속한다. 조셉 바이든과 새라 페일린, 두 후보 모두에게 양쪽 진영에서 강조하는 전략 제1조도 ‘톤을 낮춰 신중하게’로 알려졌다.
사실 바이든은 토론의 명수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부통령 자격’의 어떤 잣대를 들이대도 너끈히 합격할 만한 경륜을 갖춘 그는 민주당 경선을 통해 14번의 토론에 참가, 상당히 좋은 성적표를 받았었다. 또 후보가 된 후 무려 100회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철학, 국가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밝혀왔기 때문에 그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된 적이 없다. 아는 게 너무 많아 자제 못하는 장광설과 이에 따른 잦은 실언 등이 약점이지만 국내외 이슈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청중을 즐겁게 하는 유머에 더해 대중적 친화력도 지녀 토론 코치도 필요 없을 정도다. “그냥 평소대로 하면서 페일린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지만 민주당 진영이 승리를 자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오늘 토론은 바이든의 토론이 아니다. 페일린의 토론이다. 전 세계를 뒤흔드는 금융위기 등 빅뉴스에 가려 관심조차 끌지 못할 부통령 토론이 ‘대흥행’을 예고하는 것은 순전히 알래스카의 원더우먼 페일린 덕분이다.
높은 관심에 따른 부담의 무게는 고스란히 페일린의 몫이다. 어찌보면 오늘 토론엔 페일린의 정치생명이 달려있다.
9월초 표밭을 뒤흔든 페일린 돌풍은 지난 한두주 세찬 역풍을 맞고 있다. 부통령후보로는 전례없는 인기 속에 표밭을 누비면서도 미디어 노출은 기피해온 페일린이 숙고 끝에 간택한 ABC-TV와 첫 인터뷰를 하면서부터다. 이어 보수언론 폭스TV와의 친화적 대담, 그리고 지난주 CBS 앵커 케이티 커릭과의 ‘그 누구도 쉽게 잊기 힘든’ 인터뷰…불과 3번의 언론노출로 매케인이 그렇게 감추고 싶어 했던 ‘페일린의 바닥’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매케인 진영은 엘리트언론의 ‘페일린 때리기’를 탓하지만 그의 답변은 왜곡, 오도 등 미디어 성향에 의한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다.
“구제금융안은 경제부양에 필요한 헬스케어 개혁을 우려하는 사람들을 돕게 되며, 아, 일자리 창출과도 관계있고, 그러므로 헬스케어 개혁과 감세와 지출억제는 미국인들을 위한 감세를 수반해야하며…”“(알래스카가 러시아와 인접한 것이 나의 외교정책 경력이) 물론 될 수 있지요. 우리 이웃이 외국이고 그런 주를 내가 통치하고 있으니까요…러시아와의 국가안보 이슈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푸틴이 생각이 달라져 미국영공으로 들어온다면 어디로 오겠어요? 알래스카지요…”
페일린의 이같은 답변을 들은 사람들은 공화·민주를 막론하고 아연실색했다. 신중하고 논리정연한 칼럼니스트 뉴스위크의 파리드 자카리아 조차 ‘넌센스’ ‘횡설수설’이라는 표현을 쏟아냈다. 그렇다고 페일린에 대한 지지가 곤두박질 친 것은 아니다. 금융위기에 대한 불안이 리더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면서 그의 매력에 가려있던 자질시비가 수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오늘 토론은 페일린의 자질시비에 대한 시험대다.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세 가지다. 둘 다 신중한 나머지 승자없이 끝나는 경우, 페일린이 특유의 선샤인 미소로 분위기를 주도하며 레이건식의 짧고 지혜로운 답변으로 상대의 지식을 압도하는 경우, 둘 다 가능한 시나리오다. 공화당이 우려하는 최악은 며칠동안 집중과외를 받은 보람도 없이 페일린이 국정에 대한 기초지식 결핍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실수를 연발하는 경우다. 그런 페일린을 예비 대통령감으로 선택한 매케인의 판단력 시비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
예년과는 달리 부통령 후보 토론도 반전의 변수가 될 수 있는 2008 대선의 10월1일 오후 현재 판세는 오바마의 단연 우세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닷컴이 집계한 대의원 수는 오바마 259명, 매케인 163명, 경합 9개주 116명인데 대형주인 플로리다와 오하이오등 7개주에서의 우세를 가산하면 오바마는 당선권인 270명을 훨씬 넘어선다. 오늘 투표가 실시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여론조사에 정직하게 응했다면 페일린 자격시비에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되는데…그러나 선거는 33일이나 남았다. 아직도 반전은 가능하다는 뜻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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