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고프다’는 말을 듣고 그 뜻을 헤아리지 못 했다. 하긴 ‘물이 맵다’도 있고, 날씨가 더워서 소나기를 세 번 했다’는 학생도 있었다. 물이 매운 것은 ‘뜨겁다’는 뜻이고 소나기는 ‘샤워’를 했다는 뜻이라며 영한사전에서 말의 뜻을 찾았다고 하여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가 아닌 ‘머리가 고프다’의 뜻은 무엇일까. 이 말이 문법적으로 성립이 된다고 하더라도 제 뜻을 가질 수 있는 말일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머리가 비었다’ ‘심심하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채우고 싶다’… 등의 뜻이 아닐까.
맞았다. 그 학생이 책을 읽고 싶다고 하였으니까. 책을 찾는다고 하였으니까. 가을은 ‘책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하였더니 ‘책읽기는 일년내내 좋은 계절’이라고 말한 학생이 있다. 그래도 날씨가 서늘해서…’ 그게 아니란다. 어느 계절, 어디서나 책을 읽어야 심심하지 않다고 하니 좋은 학습 습관이 길러진 그 학생은 머리가 고프지 않을 게다. 그는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너는 무엇을 먹고 자랐느냐’고 묻자 손으로 머리와 몸을 가리키며 ‘머리는 책을 먹고 몸은 음식을 먹고 자랐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것은 알고 지내는 분이 미국 어린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머리와 몸이 제각기 다른 영양소를 흡수하고 성장한다는 생각이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나, 어른이나, 누구나 책을 읽어야겠다. 머리 고프지 않게, 성장하기 위해 책을 읽어야겠다.
책 속에는 그런 영양소가 있는 것일까. 첫째, 책이 재미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재미는 읽는 노력이 있어야 얻는 혜택이 아닌가. 더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둘째, 책에서 지식을 얻는다고 하자. 하지만 인터넷으로 더 빨리, 더 쉽게 토막 지식을 얻을 수 있지 않은가. 구태여 긴 시간 책을 읽지 않아도.
그런데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문학 작품을 영상으로 보았을 때와 책으로 읽었을 때의 느낌과 깊이가 다르다. 지식을 단편적으로 쉽게 얻었을 때와 서적을 읽고 원리를 깨닫는 것은 밀도가 다르다. 책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독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책은 생각하고 궁리하고, 사유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어떤 일에 관하여 분석 종합 추리 판단하는 정신 작용을 할 수 있는 자료와 과정을 제공한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은 배우거나 연구하여서 알게 된 내용이나 범위이다. 지혜는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즉 슬기이다. 우리가 지니고 싶은 것은 많은 지식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얻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지식은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혜는 본인이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보물이다. 이 과정을 돕는 것이 책이다.
어렸을 때부터 길러져야 하는 학습 습관 중에서 중요한 것이 독서 습관이다. 이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주위에 있는 어른들이 독서를 즐겨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다음으로 자녀들이나 학생들이 읽은 책 내용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즉 책 내용을 발표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어떤 내용이었지? 무엇이 재미있었지? 무엇을 닮고 싶지? 그 내용을 그리거나 써볼까? 그 내용을 만들어볼까? 연극으로 꾸며볼까?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볼까? 등등의 질문으로 책의 내용을 되풀이하여 음미하도록 한다. 또는 독서카드를 만들어서 그것을 모으도록 한다. 읽은 책의 수효가 약속한 목표에 도달하면 새 책을 상으로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이런 기간이 지나면 자녀나 학생들은 책 읽기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그 때쯤 되면 그들에게는 좋은 책읽기 습관과 함께 점차적으로 책을 선택하는 방향이 정해질 것이다. 처음부터 어떤 부류의 책읽기만 강요할 것이 아니다. 이것 저것 넓게 독서하면서 삶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지식들이 쌓여서 삶의 지혜를 얻게 된다. 평소에 소위 머리가 고프지 않으면서 이런 경지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허병렬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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