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구스타브는 물러갔는데 매케인은 아직도 태풍 속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의 태풍이 몰아친 것이다. ‘허리케인 새라’, 2등급이었던 구스타브보다 한 등급 정도는 족히 높을, 알래스카발 정치 태풍이다. 전혀 예상 밖은 아닐 것이다. 공화당 대선후보 존 매케인이 러닝메이트로 단 한번 만났던 알래스카 주지사 새라 페일린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샷건 웨딩이었다. 마음에 꼭 맞아서가 아니라 샷건을 휘두르는 신부 아버지, 극우 보수진영의 압력에 백기를 든 셈이다. 그만큼 매케인에게는 기독교 표밭을 기반으로 한 보수진영의 지지가 절실하게 필요했으니까. ‘코드 맞는’ 조셉 리버맨을 고집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에 비해 일찌감치 본선 진출은 확보했으나 매케인의 캠페인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우선 ‘부시-체니로 대변되는 집권 ‘공화당’ 브랜드의 가치가 금년엔 바닥으로 폭락했다. 치솟는 개솔린 가격과 무너진 주택시장으로 중산층의 가계는 엉망인데 이들을 돌보아야 할 예산은 여전히 ‘밑빠진 독’ 이라크에 끝없이 흘러들어가고 국민의 80%는 미국이 잘못가고 있다며 변화를 갈망하는…공화당 후보에겐 더없이 열악한 상황이다. ‘다행히’ 오바마의 불예측성에 대한 반사이익도 누리며 기대이상의 선전을 해온 매케인이지만 이제는 신발끈을 다시 묶고 본격적으로 뛰어야 할 때다.
지금쯤 ‘대통령 매케인’ 만들기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어 있어야 한다. 오늘이 벌써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데 아직 매케인은 뉴스의 조명조차 충분히 못 받고 있다. 허리케인 새라가 몰고 온 온갖 ‘…게이트’가 계속 터지는 바람에 매케인에겐 차례가 닿지 않은 것이다. 양당의 전당대회를 보며 대선후보를 결정하는 유권자의 비율은 10~20%에 달한다고 한다. 접전일수록 비율이 높아진다. 미시간대학의 선거 서베이 결과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매케인이 풀어야할 과제는 많다.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한 민주당의 오바마에 비해 매케인은 첫날부터 구스타브에게 발목을 잡혔었다. 매케인 뿐 아니라 공화당 전체가 숨을 죽였다. 부시행정부의 무능과 비정을 드러낸 카트리나의 기억이 떠올라서다. 공화당의 철학은 국민들이 곤궁에 처했을 때마다 “당신들이 알아서 해(You’re on your own)”였다고 몰아부쳤던 오바마의 수락연설이 가시화될까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구스타브는 맞춘듯 ‘적절한’ 영향만을 남기고 물러갔다. 태풍 대비로 부시-체니 팀이 전당대회에 불참한 것은 ‘구스타브의 선물’이라고 LA타임스 사설이 표현했을 정도다. 매케인이 안고 있는 난제 중 하나가 바로 부시와 거리두기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민주당은 이미 ‘부시-체니’ 대신 ‘부시-매케인’을 일삼아 쓰기 시작했고 여론의 과반수도 부시와 매케인 정책이 다르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아직도 매케인 당이 아니다. 부시의 당이다. 매케인이 부시의 정책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그동안 반대해 왔던 부시의 감세정책도, 연안 석유시추도 적극 지지로 돌아선 매케인을 보며 ‘어느 쪽이 진짜 매케인이야’라고 묻는 유권자들에게 한편으론 확신도 심어주어야 한다.
보수표밭도 중요하지만 매케인의 승리는 무소속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무소속의 55%, 민주당의 15%는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선거분석가들의 계산이다. 소신있는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초당적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합리적 정치가, ‘공화당 속의 ‘무소속’이라는 원래 매케인의 모습을 얼마만큼은 재확인시키며 부동층의 마음을 잡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 유권자들은 경제에서 에너지, 헬스케어, 이라크전까지 미국이 당면한 모든 과제가 민주·공화 어느 한 당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들이 무어라고 아우성치든 간에 페일린 선택은 극우보수진영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공화당 내에도 ‘매케인의 충동적 도박’이라며 혀를 차는 반대자도 상당수다. 페일린의 평가는 아직 두고 보아야겠지만 만약 페일린이 ‘재난’으로 추락한다면 민주당의 공격 못지않게 공화당내의 푸대접이 원인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매케인의 적극적 역할은 여기에도 필요해졌다. ‘부시 3기’라는 이미지 벗기 못지않게 다급해진 과제로 ‘페일린 구하기’가 떠오른 것이다.
오늘 매케인이 오바마보다 더 감동적인 연설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대한 기대는 어쩌면 더 높을지 모른다. 그가 전쟁영웅이며 경험 많은 정계원로라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미국이 부시의 미국과 어떻게 다를 것인지, 백악관 탈환에 실패해 분노한 민주당과 어떻게 초당적 타협을 이루어 갈 것인지, 그리고 ‘허리케인 새라’의 후유증은 예상을 못했었는지 그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담은 대답은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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