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오바마’를 위한 분위기는 이제 한껏 무르익었다. 뇌종양 투병중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 병상을 박차고 달려와 새 세대 주자 버락 오바마의 승리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짐했고 오바마의 아내 미셸은 역경을 딛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남편이 미 중산층의 가치관을 공유한 전형적인 ‘보통 미국인’임을 설득력 있게 호소했다. 사랑스러운 두딸이 대형화면 속의 아버지를 향해 ‘아이 러브 유 , 대디’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오바마에게서 거리감을 느끼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오바마 지지자’임을 자처하며 “오바마는 나의 후보이며 우리들의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역설한 힐러리 클리턴도 기대 이상의 전폭적 지지를 천명했다. 힐러리가 ‘생애 최고의 스피치’를 통해 참석자들을 기립 환호의 열광 속으로 몰아넣는 순간 , 오바마의 변화 무브먼트와 힐러리의 여성 무브먼트가 하나의 물결을 이루며 민주당은 정말 하나의 깃발아래 단합한 듯 보이기도 했다.
눈물과 감동, 함성과 흥분이 술렁대는 축제분위기의 민주당 전당대회가 하루를 남겨놓고 있다. 전당대회는 당의 단합을 다지는 가족 잔치를 넘어서 대통령후보의 가장 멋진 모습을 미 전국의 유권자들에게 선보이는 자리다. 동시에 유권자들에겐 후보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치열한 본선에 대한 불안이 군데군데 배여 있는 금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난 몇 달간 온갖 미디어들이 그처럼 집중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오바마에 대해 “당신은 누구신가요?”라고 묻고 싶어하는 유권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오바마 진영이 겨냥한 최대의 극복과제는, ‘uncomfortable’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편안하지 않고, 무언가 거북하고 찜찜한’ 이질감을 뜻하는데, 바로 상당수 유권자가 오바마에게 갖는 느낌이다. 8년을 별러 온 민주당의 백악관 탈환에 꼭 필요한 부동층 유권자, 소위 ‘스윙 보우터’들이 오바마에게 선뜻 마음을 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흑인이래서 싫다는 유권자는 아예 제처 놓아도 된다. 어쨌든 안 찍을 테니까. 오바마를 오늘 이 자리까지 밀어올린 오바매니아들 역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공화당에 수퍼맨이 출마한다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테니까. 문제는 잡힐 듯 잡힐 듯 쉽게 잡히지 않는 부동층이다. 특히 ‘전형적 미국인’으로 자처하는 백인 근로계층이 그렇다.
그들에게 오바마는 아직도 낯선 인물이다. ‘흑인’은 접어둔다 해도 연예인 같은 유명인사 , 말뿐인 공허한 웅변가, 통수권자가 되기엔 불안한 정치 초년생의 모습으로 각인되었는가 하면 왜 멀쩡한 미국이름 ‘배리’를 무슬림 이름 ‘버락’으로 바꾸었을까…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불경기 속 감원위협에 고전하는 근로자들에게 그는 그저 동떨어진 엘리트 정도가 아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회사에 어느 날 점령군처럼 들이닥쳐 구조조정을 단행하던 똑똑하고 냉혹했던 젊은 경영진을 연상케도 한다. 아이비리그 출신의 백만장자가 우리 형편을 알기나 하겠어? 이들에게 회의적 시각 대신 comfortable, 편안한 ‘나의 편’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급선무다.
미국인의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일견 모순적이다. 위기에 대처하는 뛰어난 능력을 요구하면서도 내 일상의 어려움을 공감해주는 편안한 이웃의 모습도 기대한다. 푸드스탬프를 배급받는 편모슬하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섰으며 6년전까지만 해도 학자금 융자상환과 크레딧카드 연체에 허덕였던 ‘전형적 중산층’ 오바마의 프로필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다.
‘바로 당신과 나, 우리들과 같은 보통사람 오바마’ 심기 , ‘부시 8년의 실패한 정치’를 계승할 매케인 때리기에서 빌 클린턴의 지지, 조셉 바이든의 러닝메이트 수락연설을 통한 충성맹세까지 어제로 조연들의 역할은 대충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오바마 자신의 몫이다.
‘오바마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조연들의 스피치를 통해 심어주려 했다면 오늘 수락연설을 통해 오바마 자신이 명확하게 제시해야할 해답은 자신의 국정방향이다. 오바마의 미국은 부시나 매케인의 미국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를 확실하게 ,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한다. 연설은 오바마가 가진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다. 4년전 무명의 상원후보였던 그를 민주당의 스타로 떠오르게 한 것이 바로 전당대회 연설이었고 당시 너무 뛰어난 연설에 감동한 나머지 일부에선 그를 ‘최초의 흑인대통령’감으로 꼽기도 했었다. 물론 이처럼 빨리 실현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오바마는 존재 자체로 오늘 45주년을 맞는 마틴 루터 킹목사의 스피치 ‘내겐 꿈이 있습니다’의 실현이기도 하다. 오늘 그의 연설도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당락에 관계없이 오늘 연설은 미국 민권역사의 중요한 한 챕터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 민주당에게 시급한 것은 선거다. 제자리에서 맴도는 지지율이 불안하다면 오바마는 오늘 연설을 하루하루가 살기 힘든 서민들에게 편안한 느낌으로 한 발 다가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감동적 웅변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경제적 고통을 덜어주는 구체적 ,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자신이 약속해온 변화와 그 실현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다시 심어주어야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왜 오바마를 뽑아야 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유권자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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