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 내외에게는 금년도 여행계획이 전혀 없었다. 2006년도 폴랜드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 국제대회에 참석하느라고 8일을 비운 동안 닭 농장을 당시에 맡아 돌보던 매니저 부부가 좀도둑임이 드러나 그들을 해고하고 새사람들을 고용하는 과정에서 1주 동안 매일 워스터 카운티를 왕래한 고생 경험 탓이었다.
그러나 누님과 매형이 좀 쉴 겸 크루즈를 같이 가자고 조르면서 비용도 대부분 부담하겠다고 하시는 데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볼티모어 항구에서 떠나기 이틀 전에 닭 농장으로부터 긴급전화가 연이어졌다. 전날 밤 폭풍우 때 우리 소유 전선주 몇에 벼락이 떨어져 변압기가 모두 타는 바람에 도합 4만 여 마리의 어린 닭들이 비명에 횡사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내가 하도 놀라서 나 혼자만 두 분을 모시고 갈 터이니 아내에게 집에 있으면서 닭 농장 위기를 수습하라고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태연자약하게 보험회사, 전기 수리회사, 전기회사 등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로 연락을 취하더니 자기가 머물러 있다고 사태가 달라질 것이 아니니까 자기도 가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또 설상가상이라고 전기회사에서 한 달 전기 값으로 무려 1만6,000여 달러의 고지서가 날아온 것도 같은 무렵이었지만 평소에 4,000여 달러 정도이던 것이 왜 갑자기 4배가량이 뛰었는가는 여행 갔다 와서 따지겠다는 배짱을 보이기도 했다. 좌우간 모 은행 인사담당 상무에 방계 증권회사 사장을 역임했던 매형이 칭찬하느라고 하신 말씀이겠지만 아내의 위기대처 능력은 대회사의 CEO감이라는 것이다. 사람 보는 눈이 있을 법한 매형에게 나는 아마도 대회사의 말단직원으로 퇴직했을 사람으로 보였음직하다.
8월9일 볼티모어를 출발한 ‘노르웨이 위풍’(Norwegian Majesty)은 1992년에 진수된 구식 크루즈 선이라서 그런지 시속이래야 20노트라 배에서 이틀 밤을 잔 다음에야 버뮤다 섬의 세인트 조지에 도착했다. 요즈음 건조되는 크루즈 선박들이 10만 톤 급이라 승객 2,500여 명에 승무원들 1,0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반면 우리가 탄 배는 승객 1,400명에 승무원들이 650여 명 뿐이었다. 60여 개 국에서 온 승무원들은 1주에 7일, 하루에 10시간씩 일해야 하며 1년에 두 달 동안만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과 해후한다는 설명이니 승객들의 호사스러움과 대조가 된다. 내가 보기에는 승무원들의 거의 80%가 필리핀 사람들이라 복도에서 그들끼리 타갈로그 어로 대화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가 있었다. 1960년대 초에는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여러 악재와 상황의 전개로 ‘한국의 필리핀화’가 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된다.
나는 속이 좁쌀 정도인지 이 걱정 저 걱정으로 잠 청하기가 쉽지 않았던 한편 하필이면 두 침대 있는 방에 배정되어 저 편에서 무사태평하게 코까지 골면서 자는 아내가 대견하면서도 약간 얄미울 정도였다. 버뮤다의 풍광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중 제일가는 것은 ‘호스 슈 베이’(말발굽형) 해변 수영장소였다. 우선 모래에 분홍색 조개껍질 가루가 섞여 핑크 비치를 이룬 것이 특징이었다. 연두색 물은 얼마나 맑은지 수영하면서 열대어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정도다. 더구나 사람이 먹던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면 팔뚝만한 큰 고기에다 녹색 열대어들이 수십 마리 몰려와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사흘을 그렇게 놀고 하루는 심한 파도에 흔들린 이틀 길을 항해해서 볼티모어 항구에 도착한 게 16일 오전 8시였다. 우리 부부로서는 억지춘향의 관광이었지만 누님 내외분이 우리 때문에 맛있는 것을 고루 잘 찾아 먹었다고 칭찬하시는 데야 우리도 그분들의 호의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일 매형 내외가 도착하실 무렵의 오이 수확표는 150여 개였다. 8월 21일 귀국하실 때까지의 오이 총계가 903개니까 두 분들이 손수 753개를 따신 것이 된다. 우리가 1964년에 미국에 온 다음 몇 년간 어머님을 모시고 있었던 매형 내외에게 조금이나마 은혜 갚음을 한 것으로 치면 억지춘향은 아니고 자의반 타의반의 휴가였던 셈이다. 떠나신 바로 다음날 전기회사에 전화를 건 아내는 한 달 전기비가 1만6,000달러라는 고지서가 틀렸다는 낭보를 듣게 된 후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진땀이 났다고 고백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