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각기 독특한 시각을 가진 60억의 우리는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나는 몇 주 동안 우리는 이 모든 차이를 잊어버린 채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만을 기억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축하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이 잊은 지 오래된 올림픽의 정신을 일깨워준다. 수십억달러 중국시장을 겨냥, 베이징 올림픽의 스폰서로 입성한 비자카드사의 올림픽 이미지 광고다. 여러 개의 스팟으로 이루어진 비자의 이미지 광고는 올림픽의 영웅들을 조명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이렇게 시작한다 - “데릭 레드먼드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400미터 육상선수인 그는 2위도, 3위, 4위도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맨 꼴찌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와 아버지는 완주를 한 것입니다”
400미터 준결승전이 막 시작된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타디움, 앞에서 달리던 한 선수가 무릎을 꺾으며 쓰러졌다. 강력한 금메달 후보, 영국의 데릭 레드먼드였다. 5차례나 수술을 받은 다리 근육이 다시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피와 땀으로 다져왔던 올림픽의 꿈이 끝나버렸음을 깨달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순간 또 하나의 ‘올림픽 ‘이 막 시작되고 있음을 당시의 그는 알지 못했다.
‘난 경주를 끝낼 것이다. 들것에 실려나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한 그가 다가오는 의료진을 물리친 후 한 발로 뛰기 시작했을 때 관중석의 한 남자가 트랙으로 달려나왔다. 데릭의 아버지 짐 레드먼드였다. 그는 경비원들의 제지를 밀어내며 달려가 아들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아들에게 그는 말했다. “아들아 , 나와 함께 가자” 스탠드를 가득 메운 6만5000명 관중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절룩거리며 결승점을 향해 다가가는 아버지의 눈에서도 , 아들의 눈에서도 , 그리고 그 두사람을 응원하는 수만 관중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정치와 돈 , 약물과 부패…변질된 올림픽의 온갖 비리들을 기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리 아닌 참가에 의의가 있으며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최선’이라고 명시한 올림픽의 정신 , 그 아름다운 패배가 준 감동이 오랜만에 제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기립한 관중들이 패자에게 박수갈채를 보낸 올림픽의 드라마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펼쳐졌다. 아귀다 아마랄은 전쟁의 상처로 황폐한 가난한 나라 동티모르의 여성 마라토너였다. IOC가 독립을 갈망하는 동티모르의 사정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특별초청한 4명 선수단 중 한명이었다.
당시 동티모르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여서 올림픽기가 새겨진 흰 운동복을 입고 뛰었던 아마랄은 선두주자보다 47분이나 늦게 골인지점을 향해 스타디움에 도착한 순간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렸다. 전쟁 속에서 자신의 집도 러닝슈즈도 모두 불타버린 채 맨발로 난민수용소에서 훈련을 받아야했던 그에겐 완주를 했다는 자체만도 너무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진행요원이 다가와 ‘아직 한바퀴를 더 돌아야 한다 ‘고 알려주었다. 아마랄은 다시 일어나 트랙을 돌아 결승점에 도달했다. 45명 중 43위였지만 실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중들의 환호가 신음하는 조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따뜻한 격려라고 그는 믿었다.
‘스포츠에 의한 인간 한계에 도전 ‘과 함께 ‘경기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이라는 올림픽의 이상이 꼴찌를 기록한 , 그러나 자부심과 감사로 빛나는 한 선수의 달리기를 통해 그림같은 하나의 장면으로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엄청난 이권에 휘둘려 약물투여와 편파판정 등 승부조작 스캔들이 난무하는 요즘의 올림픽에서 ‘ 승리보다 소중한 것 ‘을 지키는 선수를 발견하는 기쁨은 또 얼마나 큰 감동인가.
캐나다의 로런스 레미유가 요트경기에 참가한 것은 88서울올림픽 때였다. 부산 앞바다의 거친 풍랑과 맞서며 2위로 잘 나가고 있을 무렵 근처에서 다른 선수들이 물에 빠진 것을 발견했다. “항해의 제1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물에 빠진 사람은 구해야 한다 ‘이지요”라고 그는 후에 말했다. 그러나 당시는 그저 항해가 아니었다. 몇 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바쳐온 올림픽 경기였다. 메달의 기회가 눈앞에 보였지만 ‘올림픽 요트선수 ‘ 레미유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코스를 벗어나 물에 빠진 2명의 싱가폴 선수들을 자기 배에 태웠다.
베이징 올림픽이 LA시간으로 내일(8일) 새벽 개막한다. 13억 인구의 거대한 시장이 세계를 향해 오랫동안 잠겼던 문을 활짝 열면서 지구촌의 정치·경제 파워그룹들이 노골적 힘겨루기에 나섰다. 90여개국의 정상들과 내 노라 하는 대기업 총수들이 모여든 이곳에선 21세기 중국의 영향력을 테스트하는 또 하나의 올림픽이 병행될 것이다. 세계 질서의 대변화를 예고하는 ‘역사성’에 짓눌려 베이징 올림픽은 그 어느 때보다 순수성을 훼손당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205개국에서 모여든 1만여명의 선수들이다. 그들 한 사람 한사람 모두가 자신만의 올림픽 스토리를 안고 왔을 것이다. 지난 수년간 땀 흘려온 그들은 희망에 가득 차 타오르는 성화를 바라보며 승리를 다짐할 것이다. 정치와 경제는 잠시 접어두고 , 민족주의를 넘어 하나 되는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며 , 감격에 찬 승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패배의 감동을 기대하는 우리들의 마음도 함께 설렌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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