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년대 오일쇼크이후 미국은 “산유국의 볼모가 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해왔다. 전문가들이 요즘처럼 세계가 경제적으로 통합된 시대엔 맞지않는 개념이라고 면박을 주어도 계속 ‘에너지 자립’을 지상목표로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미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현재 생산량만으로도 세계 제3위 산유국인 미국은 자원 매장량으로 치자면 단연 세계 1위다. 100억 배럴이 매장된 북극야생보호구역은 북미대륙 최대의 유전으로 꼽히며 미 연안 대륙붕 일대엔 확인된 매장량이 85억 배럴이고 미확인 매장량은 미국인의 수십년 소비량과 맞먹는 860억 배럴로 추정된다. 거기에 더해 콜로라도와 유타, 와이오밍이 만나는 록키산맥의 퇴적층지대는 암석석유인 오일 셰일(oil shale)의 보고로 최대 1조8,000억 배럴까지 개발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막대한 비용과 새로운 기술, 탄산개스 발생 등 만만치 않은 장애가 가로 놓여있지만 어쨌든 모두 개발된다면 앞으로 200년은 석유걱정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당장은 그림의 떡이다. 증산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석유매장지역 대부분이 개발금지에 묶여 있어서다. 환경보호 때문이다.
미국민들은 세계 최대의 석유자원이 묻힌 땅위에 살면서도 고유가에 목을 매인 채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의 국민들 못지않게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 석유는 환경이 파괴될까봐 퍼내지 못하니 너희 석유를 좀 더 퍼 달라’고 떼쓰는 형국이라는 비아냥조차 감수해야할 판이다.
이번 주 초 부시대통령은 미 연안 대륙붕에서의 석유시추를 금지해온 대통령령을 해제했다. 1990년 아버지 부시가 내렸던 행정명령이다. 두 차례의 대형 해상 기름유출사고를 겪었던 미국의 연안시추 금지는 이중으로 단단히 묶여있다. 하나는 이번에 아들 부시가 해제한 대통령 행정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82년 제정된 연방의회의 개발금지법으로 매년 갱신된다. 금년에도 9월30일로 만료되는 이 금지법을 의회가 풀지 않으면 부시의 해제는 무의미해진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의회가 먼저 풀면 나도 해제하겠다던 부시가 지난 14일 마음을 바꿔 해제를 선언하면서 공을 의회로 넘겨버렸다. 6월에 비해 원유가가 10여달라 더 올라 대책마련이 시급해진 때문이기도 하겠고 유권자들의 분노를 겨냥한 11월 대선을 위한 포석일 수도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당장 반박했으나 입장이 그리 편안치는 못하다. 여론이 시추개발 쪽으로 잔뜩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CNN과 조그비 등 대부분의 조사결과 70%이상이 연안 시추를 찬성하고 있다.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과 무소속 유권자들도 지지가 훨씬 높다. 북극야생보호구역을 비롯한 석유매장지역 전체의 금지를 풀라는 여론도 확실하다.
석유시추는 지난 30년간 연방의회가 논쟁을 거듭해 온 이슈다. 환경단체와 손잡은 민주당과 석유기업 편에 선 공화당이 팽팽하게 맞서며 교착상태를 빠져나오지 못한 난제 중 난제였다.
에너지 사태를 해결하려면 방법은 두 가지다. 수요공급의 균형을 맞추거나 대체 에너지를 확보하면 된다. 대체에너지 개발은 민주·공화 양당이, 적어도 대원칙에선 합의를 이루었다. 문제는 수요와 공급 맞추기다. 민주당은 ‘절약!’을 외치며 수요 줄이기를, 공화당은 ‘드릴(시추)!’을 외치며 공급 늘이기를 강조한다. 왜 둘 다 병행하면 안 되는가. 공개적으로 합의하기엔 선거를 앞둔 각 당 지도부에겐 정치적 이해가 너무 많이 걸려서 일 것이다.
못살겠다는 비명이 사방에서 터지고 있으니 대책을 마련은 해야 한다. 민주당은 16일 제2의 경기부양책 추진을 밝혔고 공화당은 주택차압 관련법안과 함께 시추법안만 통과시켜도 1인당 300달러 환급효과는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거를 넉달 앞두고 표밭의 압력을 감지한 상원의원들이 초당적 타협안 마련에 나섰다. 각당에서 5명씩 10명이 모여 시추개발을 포함한 에너지 법안을 작성 중이다. 이미 민주당 중도파 10명이 지지를 표했다고 공화당은 희망을 비치고 있다.
국내 유전개발 효과에 대한 전문가의 진단도 양분되어 있다. 당장 개솔린 가격 효과도 못낼 뿐 아니라 오랜 세월 걸려 개발해내도 근본적 해결책이 안되고 환경훼손 위험만 높인다는 부정론도 적지 않다.
사실 국내 유전개발이 근본적 해결책이 되기는 힘들다는 것은 부시조차도 인정한다. 5~10년은 족히 걸리는 장기과제다. 그런데 대체 에너지 개발 역시 부지하세월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수십년은 석유의존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만약 13년전 공화당 의회가 통과시켰던 북극야생보호구역내 유전개발안에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지금의 고유가 고통은 훨씬 덜 했을지 모른다.
시추금지 해제가 주유소의 가격인하라는 효과는 못주지만 석유시장을 움직이는 심리적 효과는 충분히 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마침내’ 미국이 적극적 증산의지를 보였다는 사실이 공급증가를 확신시켜주면서 투기를 억제하고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석유시추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벌이는 워싱턴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다 알 수도 없고, 알기를 원하지도 않는 유권자들이 읽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 개솔린 값과 환경보호 , 무엇이 우선인가. 갤럽조사가 여론을 물었다. 장기적으로 개솔린 값을 인하할 에너지 개발이 우선되어야 한다가 60%인데 비해 환경보호는 34%에 머물렀다.
아름다운 북극지역 순록의 평화는 누구나 보호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당장 출근해야할 많은 사람들에겐 치솟는 개솔린 값이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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