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하순 여름의 시작과 함께 본선거로 접어든 2008 미대선 표밭에서 민주당 후보 버락 오바마를 궁지로 몰아가며 한창 뜨고있는 용어가 있다.
‘플립-플랍(flip-flop)’ - 날씨도 무더운데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재미삼아 단어공부를 해보기로 하자. 홱 뒤집는다는 뜻의 ‘플립’과 퍼덕거린다는 뜻의 ‘플랍’은 둘다 소리를 시늉한 의성어다. 공직자의 정책이나 의견이 돌변했을 때 주로 사용하는데 fl로 시작되는 의성어가 두 번 반복되면서 글자만 보아도 ‘홰까닥’ 소리가 들리는 듯, 야유와 조롱의 기미가 역력하다. 위키피디아는 ‘특히 선거전 후보가 지지율 확보를 위한 전략으로 많이 쓰는데 종전과 상반된 정책을 내놓고도 본인은 상반된 게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이 특징’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이고 있다.
‘플립-플랍’에 치명타를 당한 것은 2004년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이었다. 이라크전에 대한 그의 말 바꾸기가 캠페인의 넘버원 이슈로 떠올랐고 플립-플랍은 케리 때리기에 백발백중 성능을 자랑하는 공화후보 조지 부시진영의 요술방망이가 되어주었다.
케리가 스트라우스 월츠의 선율에 실려 윈드서핑을 하는 모습이 부각되면서 소리가 겹쳐진다. “케리는 이라크전 상원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지요, 다음엔 반대했어요, 그랬다가 다시 지지하더니, 이제 또 반대를 하고있네요” - 당시 부시진영의 이같은 TV광고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케리는 대통령의 전쟁권한 승인 결의안은 지지했으나 이라크 침공은 반대했고 미국이 승전을 선언했을 때 후세인 제거는 환영했으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확실하게 반대했고 전비지출엔 찬성했으나 추가 지출엔 반대했다. 전체적 그림을 보면 케리는 중도적 입장으로 일관하면서 이슈에 따라 합리적으로 찬반의사를 밝혀왔다. 그러나 그런 상황설명은 장황할 수밖에 없었다. 짤막하고 선명한 메시지로 이미지가 결정되는 선거전에선 참으로 답답한 대처였다.
케리의 수많은 긴 연설에서 앞뒤 다 잘라내고 찬반을 밝히는 부분만을 뽑아 연결한, 말 바꾸기 교본 같은 공화당 제작 비디오는 인터넷을 통해 삽시간에 유포되었다. 민주당 지지자들까지 그의 신뢰도를 의심하면서 케리는 제대로 해명조차 못한 채 부시에게 참패당하고 말았다.
오바마가 ‘플립-플랍’에 발목을 잡히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3주전 부터였다.
연방선거보조금을 받지않고 자체기부금으로 본선을 치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매케인보다 3배나 되는 막대한 기금을 확보한 그로서는 현실적이고 당연한 방침일 수 있다. 그러나 고액기부자들의 정치압력을 줄이기 위해 공공기금만으로 선거를 치르자는 선거자금제도 개혁은 그의 공약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기금은 풀뿌리 소액 기부가 대다수이며 현 선거자금제도는 문제가 많다고 해명했지만 미디어와 공화당은 함께 ‘플립-플라핑!’을 외쳤다. USA투데이는 그의 행보가 성오거스틴의 “나를 정결케 하옵소서 - 그러나 아직은 말고”라는 유명한 기도를 연상케 한다고 질책했다.
오바마의 입장전환은 계속 이어졌다. 며칠 후엔 그동안 반대를 천명해온 해외정보감시법(FISA) 개정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정부의 영장없는 도청 협조요구에 응했던 통신회사들에게 사생활 침해에 대한 면죄부를 허용함으로서 행정부의 도청권한을 확대시키는 이 법안은 어제 오바마의 한표를 포함해 압도적으로 상원을 통과했다. 개인의 자유를 신성불가침으로 삼는 리버럴 진영은 오바마의 ‘배신’에 분노했다. ‘불완전하지만 현재로선 테러대처를 위한 불가피한 조처’이며 국가안보를 외면할 수 없는 게 대선 후보의 입장이라는 설명은 별 설득력이 없었고 오바마의 웹사이트에는 오바마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이들의 성난 반응이 계속 밀려들고 있다.
다시 며칠 후 그는 개인의 총기규제를 위헌으로 규정한 연방대법원의 보수적 판결에 찬사를 보내며 중도를 향한 발걸음을 떼어놓았고 지난주엔 이라크전 관련 발언이 철군공약에 대한 변심을 암시했다하여 다시 벌집을 쑤신 격이 되었다. 이달말 이라크를 방문하면 현지 지휘관들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이라크정책을 가다듬겠다는 기자회견중 답변이 ‘16개월내 철군공약’에 대한 플립-플랍이라는 논란을 부른 것이다. 이번 논란에선 두 번에 걸쳐 ‘절대 변한 것 없다’고 강경 해명도 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부시정부가 지원하는 이라크총리의 본의 아닌 지원사격을 받게 되었다. 이라크가 8일 미정부에게 철군일정 명시화를 요구하는 바람에 방어의 공이 일정 제시를 거부해온 매케인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목적이 표 모으기 정략이든, 국가 위한 정책 변경이든, 후보들의 플립-플랍은 거의 불가피하다. 노예해방의 아버지 링컨도 첫 출마에선 노예제 폐지를 반대했고 리버럴의 우상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잦은 입장 변화로 인해 ‘체크양복 입은 카멜리온’으로 불리었다.
오바마의 말 바꾸기는 아직 기회주의자의 플립-플랍으로 매도당할 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극단론자들의 불평도 목청만 클 뿐 말없는 다수의 지지가 훨씬 견고하다. 문제는 앞으로다. 중도로 기우는 오바마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다. 무엇을, 왜,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원칙제시가 없이는 ‘진짜 오바마는 누구냐’고 묻는 공화당의 무차별 공격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신선한 정치인, 영감을 주는 개혁가 오바마’가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할 때다. 변화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소신과 실체가 살아 숨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게 유권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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