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조차도 빨아들일 것 같은 고요, 수천명이 운집해 있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관객들은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Dorothy Chandler Pavilion)의 홀을 정적으로 채웠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명 테너의 등장을 암시하는 듯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 서곡을 힘차게 연주하며 이 음악회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플라시도 도밍고 40주년 축제”(The Placido Domingo 40th Anniversary Gala) 이것이 지난 4월 18일에 열린 음악회의 타이틀이었다.
관람객들은 도밍고가 모습을 드러내자 약속이나 한 듯이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다.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그는 무대 중앙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윽고 그는 잔잔한 물살을 가르는 듯 차분한 음성으로 종교적 명상곡인 “오 절대자여, 심판관이여, 아버지여”(O souverain, o juge, O pere) 마스네의 르 시드(Le Cid) 3막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24년 전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 굽어진 어깨와 머리위에 살짝 내려앉은 서리, 흘러간 세월의 물결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모습이다. 내가 무대에서 열창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격으로 나는 지금 그를 바라보고 있다. 가슴을 파고드는 애조어린 곡 때문이었을까. 덧없이 흐른 세월의 무상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일세기를 풍미하는 성악가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며 이렇듯 아름다운 아리아를 들을 수 있는 행복감에서였을까. 원인도 분명치 않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어 칠레아의 오페라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 2막에 나오는 애상어린 아리아 ‘페데리코의 탄식’(Lamento di Federico)을 들려주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메디피오에게 빼앗기고, 자기의 동생 백치 소년이 이리에게 잡혀 먹은 산양의 이야기를 중얼거리다가 스르르 잠드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나도 저 바보처럼 잠들고 싶다고 탄식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리릭 테너를 위한 가장 유명한 아리아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느끼는 배신감, 그로 인해 절망으로 빠져드는 “페데리코의 탄식은 자연스런 선율과 풍부한 극적 어조로 가득 차 있는 노래이다.
바그너의 발퀴레(Walkure) 중에서 “겨울바람은 우아한 달에게 가는 길을 열어주고” (Wintersturme wichen dem Wonnemond)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이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는 쌍둥이 남매이나 이를 알지 못하고 첫눈에 서로의 매력에 끌린다. 여동생 지클린데는 어린 시절 훈딩에게 유괴당했는데 지금은 훈딩의 아내가 되어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남편 훈딩은 아내와 낯선 젊은이가 서로 닮았다는 것을 안 순간 지크문트에게 하루 밤 자신의 집에서 유함을 허락하지만 자기가 쫓던 자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고 이튿날 결투를 신청한다. 지크문트는 아버지의 약속을 떠올린다. “필요할 때는 네게 칼이 주어지리라는.”
남편의 술에 수면제를 몰래 섞어 잠들게 한 지클린데는 지크문트에게 “서양물푸레 나무에 칼이 꽂혀있으며 그것은 오직 영웅만이 뽑을 수 있다”고 귀띔해준다. 그는 감사하다는 표현으로 그녀를 포옹하며 부르는 아리아이다.
베르디의 오텔로 중에서 ‘밤의 정적속으로 소란은 사라지고’(Gia nella notte densa) 오텔로가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와 달빛을 받으며 단둘이 서서, 사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이중창으로 페드리시아 라체테와 함께 부른다. 그 외에도 차이코프스키의 스페이드여왕(The Queen of Spades) 1막에 나오는 아리아 ‘게르만’(Gherman’s)과 소로자발의 오페라 항구의 주점(La Taberna del Puerto)에서 나오는 아리아 ‘그럴 리가 없어요’(No puede ser)를 열창했다.
도밍고와 레체트가 함께 부른 투나잇(Tonight)은 장내의 열기를 더 해주는데 일조했다. 레오나르도 번스타인이 작곡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판으로 각색한 뮤지컬의 고전이다. 뉴욕 어두운 뒷골목을 배경으로 서로 적으로 있는 상대편 집단 남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민자들의 갈등과 반목 속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했다. 마리아와 토니가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 ‘투나잇’을 부를 때 들릴 듯 말듯 조심스럽게 허밍으로 따라 부르는 관객들도 있었다. 페트리시아 레체트가 부르는 토스카(Tosca) 중에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와 함께 이 컨서트 중에 유일하게 우리 귀에 친숙한 곡이다.
이번에 도밍고가 선정한 곡들은 몇 곡을 제외하고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아리아여서 난해하며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곡들이었다. 다섯 곡이라는 파격적인 앵코르를 관객에게 선사하고 커튼 콜과 기립 박수 속에 그 영광을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관중에게 돌리는 여유를 보여 주었다.
내가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런던에서였다. 아직도 쌀쌀한 추위가 남아 있던 1983년 2월 중순, 로얄 오페라하우스에서는 그가 출연하는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로 장내는 열기가 가득했다. 40대 초반이었던 도밍고는 인생의 전성기에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기량을 한껏 보여주었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가 연기력을 뒷받침 해주어 무대를 꽉 차게 만들었고 부드러우면서 박력있는 가창력은 청중을 극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오페라를 보면서 가슴이 뛰었고 흥분과 긴장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박수를 치며 서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비운의 운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연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비올레타였다.
오페라가 막을 내린 후에도 관객들은 떠나지 않고 브라보를 외치며 열광했다. 꽃비가 무대를 덮는다. 유럽에서는 관람객들이 무대를 향해 수없이 꽃을 던지기에 무대에 꽃이 수북이 쌓인다. 계속 되어지는 10여회의 커튼 콜은 그의 인기가 절정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날 새벽 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로얄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와 알프레도의 음성이, 비올레타의 절규가 귓가에 남아 있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 하나님이시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내가, 나의 슬픔이 끝날 때인 지금 죽기에는 너무나 젊습니다.” 비올레타의 아리아 ‘지난날이여 안녕’(Addio‘del passato)이 환청처럼 들린다.
40년 동안 그는 우리에게 거성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무언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거장의 풍모이면서도 겸손하고 남을 배려해주는 인격을 지녔기에 그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성악가로 존경 받는 것이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40주년 축제는 한 성악가가 평생토록 이루어 놓은 예술의 금자탑을 보았다기보다 잘 살아온 한 예술가의 일생을 볼 수 있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유숙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