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전시 동안 머물었던 방의 창가에서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던 어느날 아침, 창 앞의 테이블에 놓인 카탈로그를 무심히 펼친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몇 줄의 문장을 발견했다.
“내게 있어 작품은 언제나 유동적이고 과정적이다. … 오랜만의 서울이 찬란하고 놀랍다. 북한산을 등진 한강의 조망에는 조상들의 풍수의 지혜를 고마움으로 되새기기에 충분한 것이 있다. 강이 푸르러 거리의 중심을 흐르고, 흰 빌딩 군이 장엄한 숲을 이루었다. 누구도 예견치 못한 신기루 같은 것이 현대미술이 예견한 어떤 모형처럼 떠 올라있다.”
내 눈에는 거의 추하게 보였던 한국의 아파트 단지를 흰 빌딩의 장엄한 숲으로 보는 씻긴 시선을 지닌 이 분은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글을 계속 읽다가 나의 전 존재를 깨우는 또 하나의 글을 발견했다.
‘순수한 정신의 상태로서의 예술’이라는 말이었다. 투명하고 빛나는 예술에 대한 예지가 나의 의식을 쳤다.
이어지는 마지막 문장이 더욱 멋있어서 벅찬 기쁨과 충격 속에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려 빛나는 강의 은빛 물결들을 한참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은 네가 약할 때 더욱 강하니라”
“나는 황홀한 약함 속에 있다. 예술이 새로운 신화의 창출이라 할진대 신화는 역시 ‘현실’과 ‘시간’이라는 강한 타자적 능력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나는 다만 새로운 신화라는 그 표적을 향해 조준을 맞출 뿐이다”
일상의 시간 속에 ‘현재’라는 단 한순간에 화들짝 나의 의식을 깨우고 살아있음의 은총을 벅차게 일으켜 세우는 이 글을 쓴 분은 오랜 뉴욕 생활 끝에 LA 인근 로스펠리츠 근처에서 그림을 그리며 삶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는 93세의 화가 김병기 선생님이시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거야”라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시는 아름다운 원로, 내가 만난 그 누구 보다도 섬세하고 투명한, 젊고 열린 정신의 예리한 빛 밝음을 보여주시는 선생님의 작업을 직접보고 선생님과 대화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 나는 삶과 죽음, 지상과 영원의 일치된 시공간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선명한 언어와 호흡으로 공기를 울리는 선생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목격하고 마음에 새기고 증언하기 위해 ‘시간이 없다!’라는 급박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화실로 달려가곤 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에 위배되는 거야!”라는 놀라운 선언을 하시는가 하면 캘리포니아의 자연과 공간을 숨쉬게 된 시간들의 은총을 귀가 번쩍 뜨이는 생생하고 살아있는 언어로 말씀하신다.
혼자 듣기가 아까워 아예 녹음기를 들고 찾아가 담아놓는 선생님의 예술관은 선생님의 그림과 일치한다.
사라토가의 들꽃(사진)이라는 갈 빛, 연보라 빛, 하늘 빛의 아름다운 그림을 유심히 보면서 나의 기쁨은 커지고 나의 시선은 예리해지고 나의 가슴은 선명해지고 나의 정신이 첨예해지는 특별한 시각예술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5000년 한국미술의 정기가 현대미술과 만나는 한 장의 캔버스에 전개된 ‘정신의 상태’ … 사라토가의 들꽃이라는 그림은 점점 더 예민하게 나의 감성과 두뇌의 파장을 깨우며 첨예한 정신의 상태로 나의 전 존재적 감각을 증폭시킨다.
고국의 새벽 찬 공기, 찬 서리, 새가 솟구치며 나를 듯한 비어있는 다면적 공간, 예리하고 힘차고 섬세한 선과 공간, 형상과 추상이 총체적으로 전개되는데, 차가움, 따뜻함, 습기… 분명히 한국의 새벽에 코끝에 찡하게 느껴지는 감각적 공간, 살아있는, 움직이는 공간 … 그는 허구적(Fictive)공간이라고 그의 공간을 말했다.
무(無)가 아닌 비어있음의 공간, 충만하며 또한 허용하는 다면적 투명한 공간… 붓끝에 어린 정신이 끝없이 나의 정신을 빛의 면도날처럼 첨예하게 전개시키는데 그 정신적 공간은 빛 밝음으로 가득 차있다.
세잔의 공간이 남불의 아침과 정오의 공간이라면 ‘사라토가의 들꽃’ 공간은 사라토가라는 미국의 도시에서 그려졌지만 한국의 역사를 꿰뚫는 새벽과 아침의 차고 맑은 감각적 공간이다. 나로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명화의 탄생이었고 한국인으로서의 나와 현대미술의 관계와 모색의 선명하고 아름다운 ‘길’의 발견이었다.
추사와 겸재 정선에게서 만났던 길, 한국 현대미술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그 길의 발견 - 나에게 한국현대 미술의 준거점이 되었던 ‘사라토가의 들꽃’을 현대미술의 알 길 없는 모색에 던져진 화가 친구들과 나누고 싶다. 불편하신 손가락과 어깨로 오늘도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신다.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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