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악기에는 내 예술적 감성과 아린 역사와 미래의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J&M 뮤직사의 임무승 대표(69). 그는 중고교와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던 교육자에서 바이올린 수공 제작자가 된
이색 주인공이다. 워싱턴에서는 유일한 한인 수공제작자인
그의 이름은 일반인에는
낯설지만 음악인들 사이에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제작하는 ‘림스(Lim’s) 바이올린’은 미국은 물론 캐나다, 한국의 학생들에까지 주문이 들어온다. 악기 가격만 해도 수천달러에서 1만5천달러를 호가한다.
제작뿐만 아니라 그에게 직접 바이올린을 배우는 문하생만도 40명이나 된다. 지난달에는 애난데일에 J&M 뮤직사를 설립해, 바이올린 판매는 물론 수리 등 음악문화 보급에 나서고 있다.
대학서 강의하다 도미
설움 달래려 송판 갈아
바이올린과 그와의 인연은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북대 음대 교수였던 어머니는 그가 6살이 되자 바이올린을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제자’인 아들에게 가혹했다.
“친구들과 공차고 놀고 있으면 연습 안한다고 어머니한테 꾸중을 많이 들었어요. 어찌 보면 그 꾸지람이 싫어 바이올린에 빠져든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충남 보령. 그 산골 소년에 들려진 바이올린은 그러나 6.25란 역사의 광풍을 만나면서 그의 어깨에서 멀어졌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던 인민군들은 법관이었던 부친과 군수를 지낸 외조부의 식구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의 누나와 외갓집 식구들이 그 이념의 전란 중에 목숨을 잃었다.
살육의 충격은 컸다. 어머니는 다시는 바이올린을 들지 않았고 그의 바이올린 역시 울지 않았다.
그가 다시 이 현악기를 접한 건 교사를 하던 30대가 돼서였다. 유명한 악기 제작사인 광성악기 사장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그로부터 바이올린을 직접 만들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우선 송판 가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아 열심히 안 했는데 작품을 만들다보니 매력을 느껴 점차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책을 사서 연구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충남에서의 교사 생활 틈틈이 바이올린을 직접 만든 그는 수백 점을 지인들에 선물로 나눠주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수공 제작자로 나선 건 도미 후. 중앙대와 성균관대에서 현대문학을 강의하다 6년 전 딸을 위해 워싱턴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바이올린 제작은 제2의 인생을 열어주었다.
“미국에 오니 내 삶이 송두리째 무너졌습니다. 직장도, 정다운 친구도, 그동안 쌓아놓은 기반도 없었습니다. 어디 오라고 하는 데도, 어느 누구하고 대화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쓰라린 고독과 고립감을 이겨내기 위해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매일 밤, 나무와 씨름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같은 명장(名匠)이 되려하기 보다는 처음엔 그저 외로움을 이겨내려는 방편이었다. 송판을 깎고, 갈고, 공명을 내는 몸통 속의 속나무와 버팀 막대를 붙이고 니스를 바른다. 또 현을 장착하고 활의 장력(張力)을 재고 완성 후에는 다시 소리를 만든다.
때론 목수, 조각가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의 영감과 감응하며 새로 태어난 그 악기만의 고유의 소리를 완성시켜냈다.
“밤새도록 나무를 갈며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움에 울고 지나온 인생을 반성하며 울었습니다. 기도하듯 샌딩하며 지샌 그 밤을 거치며 고독감과 제 안에 차있던 교만과 자만심을 다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1년에 생산해내는 바이올린은 약 20개. 한 번에 열개씩 6개월에 걸쳐 완성해 고유 넘버가 붙어 세상에 나간다. 하나하나마다 수만 번의 사포질 끝에 태어난 자식 같은 존재다. 그래서 그의 손에는 지문이 닳아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제작에 그치지 않고 얼마 전 J&M 뮤직사를 설립했다. 직접 만든 바이올린을 판매하고 수리하며 레슨까지 한다. 어머니에게서 기초를 배우고 서울대 음대 계정식 교수를 사사한 그의 연주 실력은 소문을 타 뉴욕에서도 문하생들이 몰려올 정도다.
임무승 대표의 바이올린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었지만 이제는 이웃과 사회를 위해 소리를 내려한다. J&M 오케스트라 창단계획이 그것이다. 공연을 통해 장애인과 노약자, 어려운 이웃을 위로하고 수익금으로 그네들을 돕자는 취지다. 한국에서 72년부터 봉급을 털어 매년 7명에 장학금을 주며 후학들을 도와온 그이기에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나선 것이다.
“이민자들의 심정을 제가 겪어봐서 잘 압니다.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희망을 잃고 사는 분들이 많은데 음악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음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음악은 혼자만의 것에서 이제 세상의 희망을 연주하는 꿈으로 바뀌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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