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오직 단 한 번의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람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사람으로 비추어졌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조물주는 사람들에게 거울과 유리를 주셨다.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고나서 유리를 통해서 밖의 세상을 보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늘 자신에 대해서 무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하기 일쑤다. 특히 잘못을 했으면서도 침묵하거나 변명하거나 회피를 한다면 그것은 겁쟁이요 비인격적인 모습으로 남게 된다.
조선 세종시대에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은 성격이 곧고 청렴결백한 선비였다. 열아홉에 장원급제하고,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되었다. 마음속에 은근히 자만심으로 차 있었던 가운데 어느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맹사성은 스님께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관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스님은 “착하고, 백성을 생각하고, 성실하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너무 평범하고 단순한 대답이기에 별로 귀 기울여 듣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나가려다가 그만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 때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풀기 어려운 숙제이며,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 때로는 사람도 일도 다 포기하고 싶다고 말을 한다. 세상사는 것이 너무 버거워 왜 나에게 이런 운명을 가졌느냐고 한탄할 때가 있다. 그리고 세상은 지식을 가져야 하고, 부족하지 않은 재물도 얻어야 하고, 원하는 것을 다 가져야 한다고 부담을 갖게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귀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침대를 살 수 있지만 편한 잠을 살 수 없고, 지위를 살 수 있어도 존경을 살 수 없듯이 정말 중요한 것들과 사소한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느 가수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세상 부귀영화도 세상 돈과 명예도 당신 당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사람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게 여기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관심이나 목적도 갖고 계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늘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10:10)
예수님은 사람을 얻었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머리를 낮추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셨기에 결국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원자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인생을 살면서 정말 미안하고, 죄송한 것은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사람이 죽을 때 대부분 후회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남에게 베풀지 못한 것, 둘째 참지 못한 것, 셋째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 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후회할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늘 자신에 대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날마다 참회(?) 할 것이다.
정말 귀하고 귀한 것이 사람인데 사람 외에 다른 것에 더 비중을 둔 것, 사람을 보면서도 사람의 심장보다 머리를 본 것, 일하다가 생긴 거친 손바닥을 보기보다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을 본 것, 입고 있는 화려한 옷만 보고 초라한 속의 모습을 외면한 것, 작은 가정보다 큰 집의 웅장함만 본 것, 베풀기보다 베풀어주기를 기대한 것, 아픈 사람이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아프다는 것,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괜찮지 않은 것들을 모른 것, 예라고 말할 때 정말 예라고 생각한 것,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이 아닌 줄 생각한 것, 관심을 받으려고 불평하는 것을 모른 것, 가까이 있을 때가 행복한 때이고, 멀리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가까이 다가올 기회가 있다는 것, 처음보다 나중이 더 소중한 것, 맛있는 음식보다 맛있게 먹는 입이 더 귀하다는 것,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찾아가는 것이 이기는 것, 대접받는 것보다 대접하는 것이 복된 것, 머리에 있는 것보다 꼬리에 있는 것도 축복인 것, 먼 곳으로 여행 떠나는 것보다는 가까운 곳에서도 같이 있어 주는 것, 없는 것을 고대하기 보다는 있는 것을 누리는 것,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몰랐고, 알면서도 믿지 못하고, 믿으면서도 용기를 갖지 못한 것,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인데 그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 모든 것들, 무지함과 무시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언어가 있다면 ‘죄송합니다’이다. 단지 이 말이 정치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습관적이 된다면 그 말은 가장 추한 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참회록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꾼 것처럼 단 한마디의 죄송함이 변화와 반전의 기회가 된다면 그 말은 정말 아름답고 위대한 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번쯤은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용기와 겸손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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