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눈길
오경훈과 애자는 30여 년이 넘도록 한 이불 속에서 얼굴을 마주보면서 생활해오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애자는 남편 경훈한테 눈 위에 내린 서리같이 아주 차갑게 대하고 있다. 경훈이가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을 잘 안하고 눈만 흘깃하였다. 옛날 그 따스한 눈길은 어디로 갔을까 할 정도로 애자는 변화되어 가고 있다. 경훈도 같이 시위하자는 뜻인지 밝은 웃음도 사라지고 말수도 적어졌다.
애자는 경훈이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옛날 같으면 부드럽게 그냥 넘어갈 일도 아이들한테 큰소리를 치고 화를 잘 내었다. 딸도 그런 엄마가 이상한지 어깨를 한번 움칫하고는 자기들 방으로 들어갔다. 경훈은 애자가 중년의 사춘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 중늙은이의 히스테리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경훈은 미국 생활 20년이 넘었다. 전자회사에서 월급 받아 한푼도 축내지 않고 갖다주고 있다. 가끔 요리 솜씨를 발휘하여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고, 여자가 세 명이나 있어도 설거지도 해주었다. 그리고 휴가철이 되면 2-3주씩 온 가족과 함께 미 대륙을 누비고 다녔다. 또한 주말이면 애자와 걷기 운동으로 건강관리도 하고, 아이들과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도 하면 가족과의 사랑을 마음껏 즐겨왔다. 경훈은 친구들이 골프치자고 했지만 주말에 가족과 함께 있기 위해 배우지 않았다. 그리고 한인들이 잘 가는 카지노도 아직 한번도 안 가본 사람이다. 경훈은 중년의 길에 들어섰지만 아직 젊음이 시들지 않아 잠자리에서도 애자를 실망시키지 않고 있다. 요즘 보기 힘든 남편이요, 아빠인 경훈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는 애자가 중년의 사춘기일까.
경훈의 사랑과 헌신으로 두 딸도 공부 열심히 해 자기들이 원하는 대학으로 가 공부를 했다. 큰딸은 자기의 재능을 살려 광고 디자인 공부를 해 큰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내년이면 결혼할 것이다. 둘째는 내년에 졸업하면 큰 약품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가정이 행복하고 즐거운 집에 왜 회색구름이 끼고 있는지 경훈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경훈의 머릿속을 스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구석으로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다. 애자 자신의 부정을 감추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경훈은 저녁을 먹고 신문을 보고 있는데 애자가 찻잔을 들고 와 경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당신 요즘 아이들한테 큰소리치고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왜 그래?”
경훈은 보던 신문을 내려놓으면서 아내 애자한테 물었다. 애자는 보던 월간지에 눈을 두고 말을 했다.
“내가 옛날부터 큰소리 쳤어?”
“그러니 왜 그러냐고 묻잖아.”
애자는 책에서 눈을 떼고 경훈을 쳐다본다.
“이날 이때까지 내가 헛살아왔으니까 그렇지.”
1.
“여보, 뭐가 헛살았다고 그래?”
“지금 몰라서 물어요?”
“모르니까 묻고 있지 않아?”
“정말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요?”
애자는 경훈의 질문에 쉽게 답을 못하고 있다. 경훈은 애자 앞으로 몸을 숙이면서 빤히 쳐다본다.
“나보다 당신한테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경훈은 속삭이듯이 물었다.
“뭐라고. 내가?”
애자의 음성이 커지면서 당장 무슨 사단을 벌일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 빨리 말해봐.”
“그래, 그 젊은 여자가 누구야?”
애자는 그동안 마음속에 두고 있던 말을 뱉어냈다. 그때 두 딸이 방에서 나왔다.
“엄마,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들어가.”
“엄마 요즘 이상한 것 몰라?”
둘째 딸이 엄마의 행동을 지적하였다.
“뭐가 이상하다고 그래?”
“거봐 화를 내고 우리를 징그러운 벌레 보듯이 하고 있잖아.”
“아빠. 방금 엄마가 여자란 말을 하셨는데. 아빠 여자 있어요?”
큰딸이 경훈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여자라니? 나에겐 엄마 밖에 없다.”
두 딸은 아빠 엄마를 번갈아 쳐다본다. 애자는 고개를 숙이고 찻잔 속을 응시하고 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엄습해 들었다. 그 고요 속으로 큰딸의 차분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엄마. 아빠가 아니라고 하는데 자세히 말해봐요.”
“너희들은 그냥 들어가라. 어른들 일에 참견하지 말고.”
“엄마, 요즘 집안에 들어오면 따스한 온기는 없고, 꼭 얼음집 들오는 기분인 것 몰라요? 엄마. 우리도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래, 여보. 좀 자세히 말해봐요. 생사람 잡지말고.”
경훈은 지금까지 가족을 먼저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딸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와 신의를 완전 저버리는 꼴이 되어 있다. 아무런 기동도 않고 앉아 있던 애자는 싸늘하게 식은 찻잔을 들어 마셨다.
“그래. 내 다 이야기하마. 그리고 큰애 결혼하고 나면 난 집을 나갈 것이다.”
애자는 선포하듯이 딸을 쳐다보고 남편 경훈을 빤히 쳐다본다. 경훈도 애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3개월 전 네 아빠가 어느 여자와 커피숍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 혹시 내가 잘못 봤겠지 했다. 그렇다고 따지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잊어 가고 있는데 한달
2.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지난 토요일 4시경 엘 카미노 커피숍에 함께 들어간 그 여자가 누구야?”
차분하게 말하던 애자의 음성이 갑자기 격하여졌다. 옆에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 몸을 움칫하였다. 경훈은 애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감았다. 애자는 남편 경훈의 배신감에서 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부르르 떨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딸은 눈이 동글 해져 아빠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
큰딸이 화난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그 여자가 저 애요. 엄마.”
“뭐라고?”
“으 하하하!”
눈을 감고 있던 경훈의 입에서 아주 통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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