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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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 PK 실축악몽 테리
전반 헤딩선제골…제라드 쐐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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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발상지는 영국이다. 축구에 대한 긍지도 열정도 그만큼 높다. 실력 또한 좋다. 20세기에 들어 축구가 지구촌 인기최고 스포츠가 되면서 축구종가 영국의 콧대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축구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영국의 장악력을 서서히 혹은 급격히 좀먹기 시작했다. 정작 영국은 세계축구판도가 달라지는 걸 미처 몰랐거나 애써 외면했을 뿐이었다.
1930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첫 대회부터 내리 3차례 영국이 월드컵축구를 외면한 것은 축구에 대한 영국의 턱없이 웃자란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개최지가 멀어서 곤란하다는 둥 그런 시시한 대회에 우리가 왜 출전해야 하냐는 둥 훗날 돌이켜보면 잠꼬대 같은 이유를 들먹이며 월드컵을 무시했다.
문제는 세계축구계도 세계축구 판도변화에 그다지 예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뒤처리 때문에 1942년 대회와 1946년 대회를 거른 뒤 월드컵 되살리기에 나선 국제축구연맹(FIFA)은 ‘축구종가 빠진 월드컵’은 더이상 안된다며 영국 모시기에 적극 나섰다. 자신들의 힘이 강해진 걸 모르고 허리를 굽히는 세계축구계를 향해 영국은 자신의 힘의 약해진 걸 모르고 배짱을 튀겼다. 출전권 넉장을 달라. 배짱은 통했다. 영국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나뉘어 월드컵 지역예선에 참가하게 된 불평등 특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축구에서 영국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 이유다.
이같은 곡절 끝에 잉글랜드가 월드컵 무대에 ‘처음 왕림’한 것은 1950년 브라질대회.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른 잉글랜드축구의 콧대를 와장창 꺾어버린 임자가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1950년 6월29일, 브라질의 벨로 호리존테에서 무적함대 운운하던 잉글랜드는 최약체로 분류된 미국에 0대1 패배를 당했다. 미국팀은 구색을 갖춘 국가대표팀이라기보다 이 직업 저 직업에 종사하는 동호인들이 얼렁뚱땅 팀을 만들어 남미관광 겸 출전한 아마추어팀이었다. 놀라운 결과는 세계에 타전됐다. 그러나 이긴 미국도 진 영국도 그 결과를 믿지 않았다. 미국의 한 언론사는 지레 통신사의 실수일 것이라고 판단해 미국이 영국에 0대1로 졌다고 보도했는가 하면, 잉글랜드를 포함한 영국축구팬들은 잉글랜드가 10대0 아니면 11대1로 이긴 것을 잘못 전한 것이라고 믿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의 잉글랜드 격파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월드컵 이변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이 승부는 미국과 잉글랜드의 축구한판이 벌어질 때마다, 그리고 다른 나라 간 경기라도 예상밖 승부가 펼쳐지면 곧잘 인용되곤 한다.
◇그로부터 근 58년이 지난 2008년 5월28일, 런던의 유서깊은 웸블리구장에서 미국과 잉글랜드 대표팀의 A매치를 앞두고도 스포츠전문 ESPN 축구채널은 양국의 월드컵 첫 만남을 거론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잉글랜드가 지역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다음달 열리는 유로2008 본선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는 등 침체돼 있음을 꼬집으며 은근히 이변이여 다시한번을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잉글랜드의 2대0 완승. 유로2008을 바다 건너 불구경하듯 해야 하는 잉글랜드 축구광 7만1,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펼쳐진 이날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전반 38분 중앙수비수인 주장 존 테리가 헤딩으로 선제골을 뽑고 후반 14분 왼쪽날개 스티븐 제라드가 쐐기골을 터뜨리며 낙승을 거뒀다.
존 테리? 바로 그 남자였다. 꼭 1주일 전인 21일 밤, 모스크바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승부차기 때 첼시의 마지막 키커로 나서 빗물 젖은 잔디에 스텝이 엉켜 미끄러지며 실출하는 바람에 99.9% 손에 넣은 챔피언 트로피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넘겨주는 빌미를 제공하고 빗물 속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던 그가 공격에 가담해 멋진 골을 터뜨렸다. 미국 진영 우중간에서 얻은 프리킥을 스팟킥의 마술사 데이빗 베컴이 오른발로 감아 페널티 에리어 안쪽으로 우겨넣자 미국 수비숲 사이에서 솟아오른 테리가 머리로 방향을 틀어 골네트 오른쪽 구석에 꽂아넣은 것.
웨인 루니, 리오 퍼디난드, 웨스 브라운, 오언 하그리브스 등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상대편이 돼 육탄전을 불사하며 승부를 겨뤘던 선수들도 하늘을 우러르며 감회어린 표정을 짓는 테리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이 공이 테리의 모스크바악몽을 씻어줄 수 있을까. 한국의 대다수 언론매체들은 테리가 그 악몽을 훌훌 털어냈다고 썼다. 그러나 ESPN 특파원은 기사의 첫머리를 1주일만 빨랐어도라고 시작했다. 온도차가 느껴진다. 테리는 이 골을 지난주 아픔을 함께한 첼시 팬들에게 바친다고 모스크바악몽을 되새겼다.
경기 양상은 잉글랜드의 압박과 미국의 역습이 주조를 이뤘다. 웨인 루니와 저메인 디포를 투톱을 이뤄 최전방에 서고 중원에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 오언 하그리브스, 데이빗 베컴이 포진한 잉글랜드는 미드필드에서 짧은 패스를 주고받다 빈틈이 보이면 터치라인에서 터치라인까지 연결되는 폭넓은 패스나 미국문전을 곧바로 노크하는 직행전술을 적절히 섞으며 압박했다. 미국은 밀집방어를 펼치며 간간이 역습을 했으나 애슐리 콜, 존 테리, 리오 퍼디낸드, 웨스 브라운이 버틴 수비벽을 통과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 이전에 세밀한 패스가 연결되지 않아 무리한 슈팅으로 어렵게 잡은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후반 추가골은 ‘수시로 수소를 이탈한’ 제라드의 발끝에서 나왔다. 소속팀 리버풀에서 줄곧 플레이메이커 겸 섀도우 스트라이커로 뛴 탓인지 이날 왼쪽날개 임무가 맡겨졌음에도 자주 왼쪽을 비워두고 안쪽으로 파고드는 등 새 보직에 익숙치 않은 면을 노출한 제라드는 그 덕분에 후반 14분 교체멤버 가레스 배리로부터 정확한 문전패스를 받았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미국 골키퍼 팀 하워드 역시 자리를 약간 이탈한 덕분에 빈구석에 추가골을 찔러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라드는 소속팀에서는 폭발적인 활력으로 그라운드를 휘젓는 스타일이지만, 대표팀에서는 역할이 겹치는 베컴 때문에 다소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치곤 했던 약점을 이날도 여러번 노출했다.
한편 이날 다른 곳에서 열린 A매치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2대1로 눌러이겼고, 노르웨이와 우루과이는 2대2로 비겼다. 맨U의 현역전설 라이언 긱스의 모국 웨일스는 아이슬랜드를 1대0으로 이겼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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