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박지성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뻥언론은 창피스럽다
연극은 끝났다. 지구촌 축구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비내리는 모스크바의 밤 그 짜릿한 한판승부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U)를 챔피언으로 올려놓고 막을 내렸다. 2007-2008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박지성이 있어 태극축구팬들의 관심이 여느 해보다 높았던 맨U-첼시전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여진은 계속된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화제에 마침표가 없다. 쉼표도 없다. 안그래도 축구라면 거의 사족을 못쓴다 할 정도인 코리안 축구팬들은 한층 뜨거운 열정으로 사실상 지구촌 최고 축구클럽을 가리는 모스크바 승부를 지켜봤다.
박지성은 끝내 뛰지 못했다. 후보명단에도 없었다. 아시아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그라운드를 누비는 가슴 벅찬 장면을 기대했던 팬들로선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기사밑천을 위해서 장면장면 메모를 해가며 지켜보고 녹화해서 또 보고, 하이라이트를 모아 다시 보고 한 나도 그랬다. 경기 내내 그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우승 직후 시상식 직전 땀범벅 빗물범벅 눈물범벅, 흠뻑 젖은 운동장에서 펼쳐진 맨U 선수단의 막춤뒤풀이 때 경기복 아닌 양복 차림으로 뛰어나와 동료들과 얼싸안고 껑충껑충 기쁨을 나누는 그의 모습이 언뜻언뜻 TV화면을 스칠 때, 들어줄 누가 없는데도 나는 “어, 박지성이다고 나도 몰래 소리쳤다. 소리치듯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은 짠했다. 하필 그 순간 양복 입은 박지성은 어색해 보였다. 많이 서운했다.
좋아라 날뛰는 맨U 사나이들 저 너머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존 테리(첼시 주장)가 비쳐졌을 때 덩달아 내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테리는 잉글랜드의 중앙수비수로 출장한 2006년 독일월드컵 8강전에서도 승부차기 패배 뒤 두 눈이 벌게질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가공할 태클로 세계최고 공격수들마저 어지간히 몸을 사리게 만드는 이 철벽수비수의 눈물은 눈물 그 자체로 메마른 내 감성을 자극했다.
또 한편으론, 경기 때는 인정사정 볼것없는 태클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몸을 사리지 않는 육탄방어로 상대의 득점기회를 무너뜨리곤 했던 테리의 눈물은 그 역시 외계인이 아니라 나와 같은 지구인임을 보여주는 징표인 듯하여 반갑기도 했었다. 그래서 가외의 정까지 들어버린 테리가 이번에 모스크바에서 흘린 눈물은 연극이 끝난 뒤에야 양복 입은 신사가 돼 나타난 박지성의 모습과 때마침 더욱 굵게 한층 세차게 내리는 빗물들이 겹으로 포개지면서 한참동안 나를 묘하게 만들었다. 황톳길 남도 토속어를 빌자면 그 기분 참 거시기했다.
그래도 나는 박지성이 자랑스럽다. 맨U가 어딘가. 지구촌 축구 사나이라면 한번쯤 그 언저리라도 기웃거리고픈 자타공인 세계최고 명문클럽 아니던가. 비록 모스크바 교향곡 연주자로 부름받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그가 주어진 몫을 해내고 있으니 자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22일(목)자 스포츠섹션 3면
에서 인용한 루이스 피구의 말처럼 “그러나 축구는 오늘밤에 끝나지 않는다. 박지성에게는 내일이 있다, 보다 나은 내일이.
연이어 녹화중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러면서 나는 어느덧 다시 모스크바 쇼다운의 한컷 한컷에 다시 빠져들었다. 결과를 아는데도 재미는 별반 줄어들지 않았다. 양복 입은 박지성의 춤도 아까보다 훨 가벼이 볼 수 있었다.
기분전환. 희망있는 이 기분전환은 그러나 관련기사와 자료검색을 위해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엉뚱한 데로 튀었다. 실은, 어느 정도 예상한 것이었다. 하도 눈에 익은 것들이라 새삼스레 기분이 잡칠 것은 없었다. 예상,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억지에 경탄어린 쓴웃음이 나왔을 뿐이다. 한국언론의 관련보도 말이다.
“변칙 전략에 희생된 박지성” “英 언론, 박지성 버린 무자비한 퍼거슨” “연일 찬사 퍼거슨의 침묵, 배신의 암시였나” “박지성 출전명단 제외…비극의 서곡이 현실로” “박지성 결장에 깜짝 놀란 모스크바” 등등등.
경기직후 인터넷을 도배한 기사 제목들이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쯤에서 내 입장을 밝혀두자. 한국의 대다수 언론매체들이 퍼거슨 감독의 무한신뢰(살펴보니 대개 기자들이 ‘독심술’로 퍼거슨 감독의 속내를 읽어낸 것이거나 퍼거슨 감독이 다른 상황에서 한 말을 갖다붙인 것이었다)를 근거로, 혹은 긱스 나니 하그리브스(셋 다 출장했고 셋 다 승부차기까지 투입됐다) 등 박지성과 포지션이 엇비슷한 선수들의 상태를 ‘천리안’으로 들여다보고 제멋대로 내린 처방을 근거로, “박지성 선발출장 쌍나팔을 소리높여 불어대던 지난 15일(목) 스포츠섹션 2면 에 쓴 대로 “…박지성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것은 좋다. 나도 지성사랑 대오에서 한번도 이탈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세계최고 맨U의 붙박이 주전이라고 말하기엔 아직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더욱 그를 나는 애타게 응원한다.
좌간, 결승전이 끝났으니 머리와 가슴을 좀 식힐 때가 됐는데도 이제는 무자비하니 배신이니, 게다가 영국언론이 그랬다느니 세계언론이 어쨌다느니 애매하게 남의 입을 빌어 퍼거슨 감독에게 종주먹질이다. 그 와중에도 박지성 결장에 모스크바가 깜짝 놀랐다는 등 초를 치는 건 차라리 서글프다. 어느 언론사는 “(박지성의) 결장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등 무슨 사건사고 기사를 다루듯 열을 올렸다. 특검이나 대검중수부에 맡겨 수사하라고, 온국민이 촛불집회라도 해야한다고 설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다.
정말이지 박지성은 프리미어리거다. 그러나 한국언론의 박지성 기사 다루기 수준은 아직 멀었다. 지나친 박지성 띄우기는 박지성에게도 해롭다. 그리고 세상이 변했다. 인터넷 시대다. 언론이 던져주는 걸 무작정 믿던 시대는 갔다. 풍성하고 정확한 정보와 번득이는 분석, 게다가 해학과 풍자의 도가 가히 도사급인 네티즌들이 수두룩하다. 양복 입은 박지성 때문에 생긴 아쉬움 찌꺼기를 마저 버릴 겸 겉넘은 뻥튀기 수준을 눈요기할 겸, 결승전 이틀 전에 인터넷에 올라 아직도 둥둥 떠다니는 대언론사의 등외품뻥튀기와 네티즌의 명품반격을 간추려 소개한다.
<박지성 동료 루니“호날두, 맨유에 남아줘”>
제목부터 걸작이었다. 그럼, 호날두는 박지성의 동료가 아니란 말인가?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박지성을 갖다붙일 이유가 전혀 없는 기사였다. 정작 본문에는 박지성의 ‘박’자도 없었다. 골목언론이라도 이 정도면 문제인데 소위 메이저언론 기사가 이 모양이었다. 어느 네티즌이 해당기자 이름을 빗대고 제목을 비틀어 댓글을 달았다.
“이00 기자 아버지의 아들 이00 기자,
0000(회사이름) 기사 썼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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