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의 민주당 후보지명이 사실상 확정된 20일 밤에도 힐러리 클린턴은 경선 완주를 또한번 다짐했다. 오바마는 그의 심정 다칠까 공식 승리선언을 자제하긴 했지만 이미 과거시제로 힐러리를 말하고, 존 매케인은 그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고 있으며, 미디어는 왜 빨리 사퇴 안하느냐고 번갈아 재촉하고 있는데도 힐러리는 마이동풍, 끝까지 간다고 투지를 굽히지 않는다. 여러명의 해설가들과 선거분석 방송을 하던 CNN의 래리 킹이 힐러리 담당 취재기자를 불러 물었다. “도대체 힐러리를 저렇게 강행하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힐러리의 의중은 ‘차기 대선 노린다’에서 수천만 달러 선거부채 처리에 이르기 까지 여러 각도로 분석되어 왔다. 그러나 취재 기자가 전한 현장에서의 느낌은 좀 달랐다. “지지자들의 강력한 응원이 아닐까요? 첫 여성대통령을 간절히 원하는 그들의 ‘계속 하세요’라는 함성은 정말 뜨겁거든요”
지난주 사우스다코타의 지역신문엔 88세로 얼마 전 숨진 플로렌스 스틴의 이야기가 실렸다. 불치환자를 돌보는 하스피스 병실에서 그녀가 마지막 한 일은 부재자 투표였다. 힐러리를 위한 한 표였다. 여성 참정권이 허용되기 이전에 태어난 그녀는 여성대통령 탄생에 힘을 보태고 싶었던 것이다. 사우스다코타 예선일은 6월3일이고 사망자의 표는 무효화 시키는 주법에 의해 결국 스틴의 한표는 죽어버렸다. 그러나 여성대통령을 원하는 여성들의 오랜 꿈을 상징하는 스토리로 계속 화제를 모으고 있다.
‘여성 유권자는 여성 후보를 밀지 않는다’라는 종래의 속설은 적어도 2008년 캠페인에선 깨져 버렸다. 힐러리의 가장 든든한 지지 기반은 여성이다. 지난주에도 또 엊그제에도 뉴욕타임스에는 여성단체들이 낸 전면광고가 실렸다. ‘너무 빨리 (사퇴)하지 말라…힐러리의 보이스는 우리의 보이스다. 그는 우리들 여성 모두를 위해 대변하고 있다’
이해가 걸린 어젠다를 가진 여성단체만이 아니다. 실리콘 밸리에서 날아온 여성 CEO, 텍사스에서 휴가를 받아 찾아온 50대의 테크니션, 지난 주말 버지니아에서 켄터키까지 차를 타고 달려온 5명의 파키스탄계 이민여성들에 이르기까지 연령과 직업, 인종을 초월한 각계각층 일반 여성들이 힐러리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자처한다.
오바마보다 훨씬 더 엘리트 계층인 힐러리는 저소득 저학력 서민층 여성들과의 공감대 형성에도 성공했다. “힐러리가 여성이고 여성대통령 탄생이 역사적 의미가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힐러리는 내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어려운 상황들, 우리가족의 의료보험이나 개스값, 아이를 맡길 데이케어 문제등을 알아주고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라고 이들은 말한다.
여성해방운동의 완성을 위해서, 아직 사회의 약자인 여성들의 진정한 평등을 위해서, 여성단체와 여성 개개인들이 뜨겁게 갈망하며 오랫동안 키워왔던 꿈은 그러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손에 다 잡은 듯 했던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힐러리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들은 일생동안, 특히 직장에서 성차별을 체험해온 중년층 이상의 여성들이다. 경험과 실력을 갖추고도 젊은 남성들에게 계속 추월당하며 좌절감과 박탈감을 감수해야 했던 경험을 공유한 세대다. 젊은 남성 오바마에게 역전당한 힐러리의 패배는 그들에게 그저 단순한 선거 패배가 아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는데 또다시 젊은 남성에게 도둑맞다니…” 충격이고 분노다. 힐러리를 정치가가 아닌, 불평등을 감수해온 자신의 대변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힐러리야 모든 경선이 끝나고 후보가 정해지면 민주당은 하나로 단합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힐러리 자신이 오바마에게 어느 정도 지원을 보낼지는 글쎄, 아직은 미지수다. 그가 압승을 거둔 켄터키주 예선 출구조사에서 나타났듯이 두 후보간 치열한 대결이 패자인 힐러리 지지자들의 격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싫다는 응답이 90%에 달했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여성들 상당수가 힐러리 패배의 원인을 성차별로 꼽기도 한다.
정치전문 사이트인 ‘폴리티코’는 승자는 오바마이지만 ‘주목해야할 후보는 힐러리’라고 지적한다. 이번 민주경선의 힐러리 지지자들처럼 과열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CNN도 진단한다. 후유증이 클 것이라는 우려이며 오바마에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리건주 경선에서 승리한 오바마가 20일밤 연설에서 힐러리에게 바친 찬사는 이들 지지자들을 향한 화해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클린턴 상원의원은 사회통념을 깨고 장벽을 부수며 여러분과 나의 딸들이 살아갈 미국을 변화시켰고 우린 거기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미국인구의 52%는 여성이다. 유권자의 54%, 실제 투표참여자의 56%를 차지한다. 오바마의 본선전략 세우기는 오랫동안 가꿔온 꿈을 눈앞에서 놓쳐버린 이들과의 악수나누기에서 시작되어도 좋을 듯하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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