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졸업생들은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빚 없는 부유층 자녀, 빚이 있지만 부모에게 얼마쯤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중상류층 자녀, 그리고 빚의 액수는 가장 크지만 가족에게 기댈 수 없는 중산층과 저소득층 자녀 - 지난 4년 학비융자로 쌓인 부채가 분류기준이다. 어떤 선수는 빈 몸으로 가볍게, 어떤 선수는 무거운 빚더미를 어깨에 짊어진 채 새로운 출발선에 함께 선 것이다.
미국의 봄은 졸업식으로 마무리된다. UCLA의 단과대학별 졸업식이 이미 시작된 남가주에서도 내일 1만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USC 졸업식이 거행되면서 본격적인 대학 졸업시즌에 접어들 것이다. 젊은 꿈의 설레임, 부모들의 보람과 자부심이 한데 엉켜 한껏 들뜬 이맘때의 대학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인 즐거운 풍경이다.
금년 졸업생의 대부분은 1986년에 태어났다. 미국에선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공중폭발하는 참사가, 소련에선 체르노빌 핵발전소 방사능 대량 누출참사가 발생했던 해였다. 베이비부머들에겐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22년 전이다. 4.29폭동 무렵에 유치원을 다녔고 막 중학생이 되면서 대통령 클린턴의 섹스스캔들에 혼란스러워하고 전 세계를 뒤흔든 9.11테러에 충격받은 고교 신입생이 이들이었다. 18세 성년이 되어 첫 투표권을 행사한 대선에서 부시가 재집권한 2004년에 대학에 입학한 후 세계의 기존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경제 패러다임이 자리 잡는 변화의 시대 속에서 공부하고 놀며, 꿈꾸고 사색하며, 방황하고 좌절하다 재기하면서 이들은 성숙해왔다.
이들이 태어났던 해 조지타운법대 졸업식의 초청연사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은 5분 남짓의 짧은 스피치로 졸업생들의 박수를 받으며 이렇게 당부했었다. “여러분은 사회에서 실제 가치 이상의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 값비싼 서비스를 받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면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훨씬 큰 보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코너 대법관의 이런 신념에는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담겨있다. 몇해전 법대를 졸업한 제임스 스타인이라는 젊은 변호사의 꿈도 그 신념과 맞닿아 있었다. “난 플로리다에서 관선변호사로 일을 시작했어요. 가난한 농촌주민을 돕는 게 정말 보람있었습니다. 그러나 갚아야할 학비융자가 10만달러가 넘는데 4만달러 연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지요” 빚을 갚아야하는 ‘현실’에 묶여 그는 가난한 약자를 위해 일하는 ‘이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졸업생은 사회학자 아냐 카메네츠가 명명한 ‘빚진 세대(Generation Debt)’에 속한다. 3명중 2명은 빚을 안고 졸업한다. 지난 4년간의 학비융자 부채가 1인당 평균 2만5,760달러다. 갚으려면 8년이 걸린다. 융자액 10만달러가 넘는 법대나 의대 졸업생의 경우엔 30년이 걸린다. 결혼해 낳은 자녀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까지 갚아야 할 판이다. 거기에 더해 크레딧카드 빚도 만만치 않다. 18~34세 연령층의 평균 카드빚은 4,358달러에 달한다. 많은 대학생들의 카드 사용처도 교과서 구입과 학비로 나타났다.
학생들만 빚더미에 올라앉은 것은 아니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주택의 2차저당은 기본이고, 크레딧카드 빚과 함께 은퇴연금을 앞당겨 허물어 써도 매해 치솟는 대학학비 감당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지난해말 하버드대학이 학비보조대상을 연수입 18만달러의 중상류층까지 확대했다. 미국가정의 90%이상이 자녀 대학보내기에 허덕인다는 뜻이다.
고교만 졸업해도 중산층이 될 수 있었던 30년전엔 정부의 보조도 넉넉했고 중산층 가정도 대학학비를 무난히 부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는 경제적 성공도, 중산층 진입도 어려워졌다. 대학졸업장은 안정된 삶의 필수조건이 되었는데 학비는 치솟고, 정부보조는 줄어든다. 학생과 부모의 빚만 늘어간다. 뉴욕대학의 한 교수는 “머지않아 눈덩이처럼 불어난 학생융자부채로 인한 전국적 재정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빚내 얻은 졸업장으로 무장하고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이들에게 ‘진짜 세상’ 현실은 전혀 만만치 않다. 평균 3만2,000여달러의 인문계 초봉으론 빚 갚기는 물론 기본생활 꾸려가기도 쉽지 않다. 최저로 잡은 아파트 렌트와 자동차 경비, 식비와 융자상환금을 제외하면 영화관람 조차 삼가야할 정도다.
자동차 쇼핑하듯 대학도 성적이 아닌 형편에 맞게 골라야한다는 전문가의 조언도 새겨들어야할 필요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내일을 책임질 젊은 인재들이 시작부터 채무자로 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대학은 졸업해야 하는데, 등록금은 오르고 부모의 수입은 제자리걸음이니 다른 방도가 없다. 이자율 6.8%의 연방융자로 부족하면 12%가 넘는 사설융자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학생들에게 융자는 유일한 재원이다.
오바마와 힐러리, 매케인까지 대선후보들이 중산층의 학비부담 감소위한 공약을 내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학비보조에 보다 현실적 기준을 적용하여 융자 아닌 그랜트(갚을 필요없는)의 수혜대상 확대 정책을 약속하는 후보가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졸업생들이 떠안고 있는 빚더미가 그 확실한 근거일 수 있다.
박 록 주 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