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18세 홍안의 청년이 과거급제를 하고 이듬해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를 졸업한다. 일본 유학을 통해 처음으로 근대화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돌아온 1884년, 그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혁세력들과 함께 부패 무능한 기존 정치세력에 대해 갑신정변이라는 급진적인 방법을 통해 개혁운동을 일으켰다가 수구파의 거센 반발과 청의 간섭으로 인해 ‘3일 천하’로 끝난다.
역모죄로 일본으로 피신가지만 그 곳에서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자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 이 청년은 자기 부모와 형제 그리고 부인과 아들이 모두 자살 아니면 타살을 당하는 소위 3족이 멸족되었다는 비보를 접한 채 다시는 한국 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사고무친의 낯선 땅 미국에서 망명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청년이 바로 풍운의 인물 서재필이다. 이후 송재 서재필(1864~1951)은 혁명가이자 개혁운동가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주의 운동가로서 다양한 삶을 살게 된다.
올해 부활절을 지나고 3월29일부터 30일까지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그리고 볼티모어에 다녀왔다.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 목사와 한국 선교의 산파역을 맡았던 가우처 목사에 대해 123년만에 은혜를 갚는 보은음악회를 갖게 된 나성 배재코랄의 일원으로 다녀온 것이다. 아펜젤러 목사를 파송한 펜실베니아주의 랭캐스터 제일감리교회와 가우처 목사가 당시 시무하던 볼티모어 소재 러블리레인 감리교회 등 두 곳에서 감격적인 연주회를 가졌던 이번 연주여행 중에는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개회 사상을 고취시킨 서재필 스승의 기념관을 참배하는 순서도 있었는데 그 곳에 가서 비로소 서재필 박사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어귀에 필라델피아시가 세운 사적지 표시판에 서재필 박사의 영문 이름인 ‘Dr. Philip Jaisohn’과 함께 그분의 공적을 기술하면서 마지막에 그가 25년 동안 살았던 집이라고 써 있었다. 주위에 수선화가 많이 피어 있는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자리한 3층짜리 벽돌집 안에는 서 박사의 파란 많은 일생이 사진 등 여러 자료와 함께 잘 정리되어 있어 한 눈에 그분의 삶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침 일행 중 서 박사의 후손이 있어 버스 안에서 서 박사에 대한 설명을 사전에 들은 바 있었고 거기다 기념관 안내자의 설명으로 더욱 확연히 그분의 일생을 알 수 있었다. 20세에 미국에 온 망명자 서재필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일하고 공부에 전념하여 1892년 한인 최초의 의사가 된다. 이러한 청년을 흠모하는 백인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된 서재필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한국으로 1895년 12월 고종의 부름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그가 혁명에 실패하여 망명을 떠난 지 11년만이었다.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기독교 정신에 대해 잘 훈련이 된 서 박사는 한국에 오자마자 중추원 고문으로 있으면서 민중계몽과 선진 정치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최초의 근대적인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독립협회, 독립문, 독립관들을 세워 우리 민족에게 자주, 민권의식과 민주정신을 처음으로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는 청나라 편을 드는 수구파의 미움과 친일, 친러파에 쫓기게 되어1898년 미국으로 두번째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가 한국에 있던 짧은 2년여 동안 서재필은 미국인 부인과 함께 아펜젤러의 집에서 살면서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펜젤러는 서재필의 개혁방법을 공감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의 학생들에게 역사, 정치, 경제, 교회사 등을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비전을 심어주어 장래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하였다.
다시 미국에 돌아온 후 서 박사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한 이후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의 큰일을 위해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고교 동창과 동업으로 문구 및 인쇄사업을 시작하였고, 10년 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Philip Jaisohn & Co.’를 운영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4월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여는 등 이후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모든 힘과 재력을 바치느라 제대로 사업을 돌보지 못하게 되어 파산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에 다시 의학 공부를 재개해 의사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군의 징병검사관으로 자원해 미국을 위해 봉사를 하는 등 지금 같으면 환갑이 넘어 은퇴를 앞둔 나이인데도 강인하고 개척자적인 삶을 일관하였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5일 전쟁의 충격 속에 메디아의 자택에서 87세의 파란 많은 생을 마쳤다.
워싱턴 DC 한국 총영사관 앞 잔디밭에 서재필 박사의 동상이 섰다. 그가 간지 47년만의 일이다. 주미대사관과 워싱턴 한인사회의 공조를 통해 동상이 건립되는 이날을 DC 정부는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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