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배의 창고에 처박혀 일본에 도착한 젊은이들의 생활은 끼니를 때울 수 없을 정도였다. 후원자라 믿었던 일본이 등을 돌려 냉대함에 그들은 이를 갈았다. 조선 정부가 보내는 자객들에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위험한 생활이다. 서재필에게는 고국에서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 온다. 부모와 처가 자살하고, 두 살 된 아들도 굶어 죽고, 형과 동생도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스무 살에 쿠데타에 가담한 젊은이의 심장은 찢어진다.
서재필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5개월간 멸시 받던 일본을 떠나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승선료는 달필로 한시를 써 일본 사람들에게 팔아 마련한다. 김옥균은 일본에 남아 외딴 섬에 유배되는 등 갖은 고생 끝에 1894년 자객 홍종우에게 유인되어 샹하이에서 살해당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1860년부터 몰려온 중국 이민이 도시 인구의 10%인 6만여 명이나 되었다. 지역당국이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하고, 타 인종에 대한 학대도 극심하였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영효와 서광범은 한 달을 못 견디고 떠난다. 양반 체면에 노동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 남은 서재필은 살기 위해 막일도 마다 않는다. 낮에는 매일 10마일씩 뛰어다니며 가구점의 광고전단을 벽에 붙이고, 밤에는 YMCA와 교회에서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인이 된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은 ‘은둔의 나라 진보주의자들의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보도를 한다. 동방의 코리아라는 나라의 젊은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가 교인들에게 퍼진다.
그런 막노동 생활이 1년, 행운의 여신은 아까운 청년을 버리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펜실베니아의 광산재벌 홀렌벡이 학비를 대주겠다고 나선다. 서재필은 그를 구호천사라 불렀다. 펜실베니아의 윌크스베리라는 도시로 후원자를 찾아간 그는 힐맨 아카데미라는 사립고교에 들어간다. 미국에서도 상류층만 다니는 곳이 사립학교다. 서재필이란 이름의 발음을 역순으로 하여 Philip Jaisohn이라는 영어 이름을 짓는다.
그는 스캇 교장의 사택에 같이 사는 특혜도 누린다. 학교 공부에 더하여 교장으로부터 미국이란 나라의 모든 것을 듣고 배운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동생뻘 아이들과의 늦깎이 공부지만 발군의 실력으로 4년 과정을 줄여 3년 만에 졸업한다. 특히 연설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졸업생 대표연설도 한다.
프린스턴 대학과 라파예트 대학에 합격하여 꿈에 들떠 있던 그에게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등을 돌린다. 후원자가 서재필이 신학교에 가지 않으면 더 이상 후원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간 도와준 동기는 선교사로 교육시켜 조선에 보내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청천벽력이었다. 서재필은 호소한다. 자신이 기독교인이지만 선교사가 될 자신은 없고, 조선에 돌아가면 역적으로서 참수당할 위험이 있다고, 그러니 신학대학원을 갈 지 여부는 4년 학부를 마치고 생각해 보면 안 되겠느냐고.
그러나 후원자는 냉정했다. 후원자와 결별하고 다시 외톨이가 되어 길거리로 나온 그의 앞길은 막막했다. 라파옛 대학을 찾아가 장학금을 호소해보나 그 대학에도 후원자가 이사로 있어 장학금을 못주게 한다. 입학비를 벌어보겠다고 막노동을 해보기도 하나 세상은 녹록치 않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다행히 교장 선생과 지인들의 추천으로 워싱턴으로 와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동양의학 서적 분류와 번역을 하는 일에 취직한다. 한인 최초의 미국 공무원이 된 것이다.
당시 돈으로 100불이나 되는 적지 않은 월급에 직업이 안정되자 1988년 콜럼비안대 부설 코코란 야간대학에 들어가 1년간 공부한다. 공무원 등 직장인들을 위해 오후 6시부터 4시간을 수업하는 야간대학이다. 1890년에는 국적을 버리는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 끝에 시민권을 얻는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미 시민권자가 된 것이다. 황인종에게는 아예 국적을 주지 않던 당시 상황에서는 예외적인 일이다.
1989년에는 컬럼비안대 의학부에 입학하여 3년 정규과정을 마치고 1892년 한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 학위를 받는다. 인턴을 거쳐 1894년에는 의학도서관을 그만두고 병원을 개업한다. 방 하나를 커튼으로 막아 진료실과 침실을 겸한 병원이다. 그러나 동양인 의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환자들이 별로 없다. 이유 없는 인종차별에 스트레스를 받던 중 7살 아래의 뮤리엘 암스트롱이라는 처녀와 인종을 넘어선 사랑을 하고 1894년 6월에는 결혼을 한다. 남자 쪽도 여자 쪽도 무척 고민을 거듭한 국제결혼이었다. 아내는 미 철도우체국(U.S. Railway Mail Service) 초대 국장의 딸로 쟁쟁한 가문이어서 워싱턴 포스트 등 언론이 대서특필한다. 키 178센티의 동양미남과 173센티 서양미녀 간의 결혼이다. 그녀는 남편의 사람됨과 역할을 평생 존경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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