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가 또 다시 살아났다. 지난 1월 뉴햄프셔에서, 2월 캘리포니아에서, 3월 오하이오에서…이렇게 매달 죽음의 문턱에서 기사회생했던 힐러리 클린턴이 22일 필라델피아에서도 미디어들이 거의 강요하듯 들이댄 높은 ‘생환가능 기준선’을 뛰어넘으며 되살아난 것이다. 민주당 경선이 4번째 오버타임에 들어간 셈이다.
이번엔 그러나 ‘컴백 키드 힐러리’라는 표현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컴백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힘들어서다. 문제는 시간이다. 미디어와 정치분석가들이 다소 인색하게, 다소 불공평하게 정해놓은 10%포인트라는 승리 격차를 무난히 달성했으니 경선을 계속할 명분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번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되돌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 보인다.
판세는 펜실베니아 예선 전이나 후나 별로 바뀐 게 없다. 힐러리에게 ‘멋진 밤’이었던 22일은 버락 오바마에게도 그다지 나쁜 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숫자가 말해준다. 55% 대 45%로 오바마를 누른 힐러리의 승리는 오바마가 우세한 전체 그림의 어느 한 부분도 바꾸지 못했다. 오바마는 여전히 대의원 수에서도, 전체 득표수에서도, 모금액수에서도 여유있는 리드를 유지하고 있다.
숫자는 현실이다. 객관적 사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숫자는, 그렇지만 선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대부분의 선거는 예측하기 힘든 추상적 요소에 의해 반전을 거듭한다. 한번 불면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무명의 오바마를 선두주자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물결 등이 숫자 못지않게 선거의 결과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바람을 기대하기엔 너무 늦었다. 민주당 경선은 이미 유권자도, 후보도 지친 기색을 보이는 종반전을 넘어섰다. 오바마가 결정적 실수를 하지 않는 한 힐러리의 후보지명은 너무 아득해 보인다.
판세 뒤집기엔 역부족이었지만 힐러리는 이번 승리로 오바마의 발목잡기엔 성공했다. ‘오바마 후보지명’ 기정사실화를 일단 유예시킨 것이다.
두 후보에게 펜실베니아 예선의 의미는 각각 달랐다. 사퇴압박과 자금 고갈에 시달려온 힐러리에겐 생존이 달린 선거였고 지난 한달여 동안 ‘갓 댐 아메리카’와 ‘비터게이트’라는 대형 악재들에 시달려온 오바마에겐 대처능력을 증명해야 할 중요한 첫 시험대였다.
예선 결과가 남겨준 과제도 각각 다르다. 생존에 성공한 힐러리는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더 높은 장벽에 부딪쳤다. ‘갓 댐 아메리카’의 관문은 일단 무사히 넘긴 듯한 오바마에게도 만만치 않은 과제가 주어졌다. 백인 근로계층 유권자에게 어필하는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백인근로계층 유권자는 25세 이상 미 성인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오바마가 이번 예선에서 끌어안기에 실패한 이들은 민주당 본선 승리에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지난 40년간 대선 때마다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 되어왔다. 2000년과 2004년 민주당 패인중 하나도 이들 표밭에서 ‘진보적 엘리트’ 앨 고어와 존 케리가 두자리 수 격차를 보이며 뒤졌기 때문이라고 USA투데이지는 지적한다.
‘미국의 심장’ ‘침묵하는 다수’ ‘레이건 공화당’ 등으로 불리어 온 이들이 핵심 유권자로 포진하고 있는 곳이 오하이오와 펜실베니아 등 힐러리가 승리를 거둔 대형주들이다. 경제이슈에선 민주당 정책을 선호하면서도 가치관 이슈에선 보수인 공화당 편으로 기울어져 있어 스윙보트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이들과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엘리트’ 오바마의 본선 경쟁력을 문제 삼는 힐러리의 주장은 그러므로 일리가 있다.
객관적으로는 후보지명이 물 건너 가버린 힐러리의 유일한 희망은 수퍼대의원이다. 수퍼대의원의 절대다수가 힐러리 편에 서준다면 당은 분열될지 몰라도 힐러리에겐 승산이 생긴다. 앞으로 힐러리 진영이 오바마의 백인근로계층에 대한 취약성 공격에 집중할 것은 확실하지만 오바마쪽으로 움직이는 수퍼대의원들을 되돌리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수퍼대의원들의 속마음에 오바마의 경쟁력에 대한 의구심을 키우기엔 충분할 수 있다.
앞으로 9개지역 경선이 남았지만 노스 캐롤라이나 등 5개주에선 오바마 강세가 뚜렷하고 켄터키 등 3개주는 힐러리 컨트리다. 민주당 경선 최후의 전투지역은 5월6일 예선을 치를 인디애나란 뜻이다. 오하이오나 펜실베니아와 여러모로 닮은꼴이지만 오바마의 출신지인 일리노이와 인접해 있어 다른 곳보다는 오바마에 유리할 수 있다.
인디애나의 핵심 표밭도 백인근로계층이다. 여기에서도 지금까지의 패턴이 반복된다면, 앞으로 2주안에 오바마가 미 서민과의 공감대가 없는 ‘진보적 엘리트’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패배한다면, 힐러리는 또 되살아날 것이다. 어쨌든 전국 민주당원 49.7%의 지지를 받고 있는 힐러리는 결코 사퇴하지 않을 것이다.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해야하는 수퍼대의원들도 쉽게 마음을 정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때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민주당 후보 지명전은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전당대회까지 계속될 것이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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