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팔 붙잡고 “호남 사람 괄시하느냐”
첫 방미 이승만 70여명만 초청
박정희는 최초로 시위대 맞아
‘광주원흉’ 전두환땐 ‘데모물결’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워싱턴 방문은 재미동포의 입장에서는 모국의 국가 최고 지도자를 만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다. 그중에서도 환영 리셉션은 대통령과 이민을 떠난 동포들이 공식적으로 대면하는 유일한 창구다. 그래서 환영 리셉션에 참석하려는 한인들의 수요는 늘 많았다. 또 한때는 환영위원회의 주도권을 놓고 대사관과 각 한인회, 유력 인사들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면 군사독재 시절에는 반정부 시위의 목소리도 높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역대 대통령의 방미와 리셉션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다.
김영삼 “동포들 미국화해야”
김영삼 대통령이 리셉션장을 막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앞줄의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며 퇴장하던 중 갑자기 한 중년 여인이 대통령의 팔을 잡았다. YS의 옆에서 사방을 예의주시하던 경호원들은 화들짝 놀라 그 여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여인은 “호남 사람들 괄세하느냐”며 대통령에 대갈 일성했다. 경호원들은 즉각 여인을 대통령으로부터 떼어놓았고 YS는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른 채 행사장을 빠져 나갔다.
김영삼 대통령이 처음 방미한 1993년 11월21일 D.C.의 쇼람 호텔에서 열린 동포 환영연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대통령의 팔을 잡은 겁 없는 그 여인은 당시 남상돈 북버지니아 한인회장의 부인으로 밝혀졌다. 대통령 환영연의 헤드 테이블에 남편을 앉지 못하게 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에 앞서 워싱턴한인회 정세권 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헤드 테이블에 들어가자 남 회장과 김창근 수도권메릴랜드 한인회장도 뒤를 따라 가다 경호원들에 제지당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대사관에서 지역 한인회장들을 차별한다고 생각한 이들은 대통령이 리셉션장을 떠나자 반기문 공사, 배진 총영사 등 대사관 직원들에 큰 소리로 항의하며 불만을 터트렸다. 그리고 대사관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평통 자문위원 직을 사퇴했다.
이래저래 뒷말을 낳은 김영삼 대통령의 환영연은 그래도 종전에 비하면 조용하게 넘어간 것이었다. 무엇보다 역대 대통령의 방미 때마다 회장 자리와 주도권을 놓고 시끄럽던 환영위원회가 처음으로 사라졌다.
정세권 당시 워싱턴한인회장은 “당시 한인회 간 갈등이 있어 우리가 환영위를 구성하자 두 지역 한인회도 환영위를 만들겠다고 했다”며 “그러자 총영사가 문민정부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만류해 환영위원회가 결국 구성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동포 리셉션은 또 하나의 화젯거리도 만들어냈다. 대통령의 격려사에서였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민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미국의 주인입니다. 여러분들은 미국화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제일 잘하는 일이고 조국을 사랑하는 일이고 여러분의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모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동포들의 현지화’를 꺼낸 것이다. 그 후 이는 정부의 재외동포정책의 방향키가 돼왔다.
이승만 “우리 집이 없어”
워싱턴을 처음 방문한 한국 대통령은 역시 이승만이었다. 1954년 7월26일 미국을 찾은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회담, 상하원 합동회의에서의 연설, 뉴욕에서의 ‘영웅 행진’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28일 의회에서 연설한 이 대통령은 저녁에 D.C.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를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당시 워싱턴 지역의 한인 수라 해봐야 고작 50명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별도의 동포 리셉션은 갖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70여명을 초청한 만찬장에서 이 대통령은 “우리 집이 주미 한국 대사관이므로 아무리 궁핍할지라도 각하를 우리 집에 초대해야 마땅하나 손님에 비해 집이 너무 협소해 메이플라워에 초대했다”고 인사했다. 전쟁을 막 치른 나라의 사정이 연설에 그대로 묻어났다.
만찬 도중에는 성악가 김자경이 ‘봉선화’ 등 한국 가곡을 불렀고 황재경 목사가 악기인 톱을 연주했으며 그의 딸은 한복을 입고 고전무용을 추었다.
박정희, 최초로 시위대를 만나다
건국 이후 두 번째 공식 방문은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16일 윌리엄스버그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17일 낮 12시경 존슨 대통령과 펜실베니아 스트릿에서 함께 카퍼레이드를 한 후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도착했다. 당시 별도의 동포 리셉션을 가졌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와싱톤 지방 교포회 학생회’에서는 박 대통령 환영을 위해 퍼레이드에 참가해달라고 한인과 학생들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 여권 문제등 정부에 대한 건의서를 박 대통령에 제출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3선 개헌을 앞둔 1969년 8월22-23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리차드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앞서 대선에서 낙선해 방한했을 때 박 대통령의 홀대를 기억한 닉슨은 워싱턴이 아닌 미 서부로 회담장소를 정해 박 대통령을 서운하게 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로광욱 등 50여명이 3선 개헌 반대 구호를 외치며 대사관까지 행진하고 항의문을 제출했으며 백악관까지 데모를 계속했다. 이는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장장 20여년이나 지속된 워싱턴 민주화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1974년 유신 독재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세 번째로 미국을 찾았다. 덜레스 공항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황재경, 한표욱, 최제창씨 등의 영접을 받았으나 역시 거센 시위대와 마주쳐야 했다.
전두환, 경호원들과의 격투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기반으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중 두 차례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러나 피의 집권 때문에 그는 수많은 돈을 뿌려대며 동포들을 동원해야만 했다.
그가 도착하는 1981년 2월1일 앤드류스 공군기지로 가는 길에는 33대의 버스가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정부의 지원아래 동포 환영위원회(위원장 최제창)가 동원한 한인들이었다. 오후 4시 전두환이 도착하자 동원 인파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전두환을 반겼다. KBS 아나운서 출신인 이광재씨는 ‘만세!’를 선창해 두고두고 뒷말을 낳았다. 이날 ‘환영객’들에는 스카프가 선물로 들려졌다.
전두환은 숙소인 블레어 하우스 앞에서도 통일교 신도 등 1천여명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환영객들만이 아니었다. 라파엣 공원에는 2백여명의 데모대들이 ‘광주 원흉’이라 쓴 플래카드를 들고 전두환을 압박했다.
<이종국 기자.내일 계속>
전두환 대통령이 방미했던 1981년 2월1일 밤. 워싱턴의 힐튼호텔에서 열린 동포 리셉션의 열기는 반 전두환의 물결에 묻혔다. 이는 워싱턴에서 열린 첫 대규모 환영연이었다. 그러나 호텔 앞에는 김응태, 박백선씨 등이 삭발을 하고 죄수옷을 입은 채 기다렸다. 고세곤, 박문규, 심기섭등 50여명의 데모대들은 경비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며 ‘살인마’등 구호를 외쳐댔다. 호텔에 입장하는 동포들과 대사관 직원, 대통령을 수행한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을 비롯한 재벌들은 곤욕을 치렀다.
또 동생인 전경환을 전두환으로 착각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본보 유석희 사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전두환은 시위대를 피해 호텔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걸 모르던 시위대의 눈에 전두환과 비슷하게 생긴 이가 탄 검은 세단이 도착하자 ‘저 XX 왔다!’며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시위대의 조병웅이 바리케이드를 뛰어 넘어 세단으로 돌진했고 경호원 4-5명이 반사적으로 조를 막았다. 조와 경호원 사이에 순식간에 격투가 벌어졌는데 수에서는 밀렸지만 태권도가 5단인 조병웅의 기세도 대단했다. 활극은 그러나 미 경찰들이 달려와 금세 끝났다. 조는 체포됐으나 경찰은 금방 풀어줬다. 당시 미국에서도 전두환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어 경찰들도 시위대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다.”
전두환의 방미는 동포사회를 분열시키는 역작용도 했다. 대사관이 주도해 만든 환영위에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강철은 워싱턴한인회장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환영위의 모양새가 구겨졌다. 이는 대통령 환영위 파동의 시발점이 됐다.
전두환은 1985년 5월25일 2차 방미를 했다. 앤드류스 공항에서는 송제경 환영위원장, 계은순 워싱턴한인회장, 마종인 평통 회장 등이 전을 맞았다. 이번에는 계은순 회장이 위원장을 맡겠다고 나섰으나 투표 끝에 송제경에 밀렸다. 한인회의 반정부 기류를 감지한 대사관(이동익 총영사)이 나서 ‘작업’을 벌인 결과였다.
전두환은 이번에는 헬리콥터로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으로 이동한 다음 숙소인 한국 대사관저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했다. 그 길에도 역시 환영과 반대 인파들이 뒤섞였다. 그 가운데 조창구씨가 대통령이 탄 차 앞으로 끼어들고 박백선은 도로에 뛰어들다 경찰에 연행돼 벌금 10달러를 물고 석방됐다.
26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백악관 앞은 환영파와 반대파가 갈려 경쟁적으로 구호들을 외쳐댔다. 그날 오후 14가의 내셔널 메리엇 호텔에서 열린 동포 리셉션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만찬장에 들어가던 한인들에는 야유가 쏟아졌고 한 중년 여성이 청와대 경호원의 얼굴을 때리는 일도 발생했다.
노태우, 환영위원장 파동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 전 워싱턴을 찾은 데 이어 취임 후인 1989년 10월15일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방미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집권한 노 대통령을 맞는 분위기는 전두환 때와는 달랐다. 시위도 수그러들었다. 환영위원장은 오석봉 워싱턴한인회장이 맡았다. 반기문 총영사를 위시한 대사관의 지원을 받은 1천명 가까운 환영 인파들은 앤드류스 공항으로 영접을 나갔다. 리셉션은 듀퐁서클 근처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마련돼 70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석봉 회장은 “6.29 선언에 합법적으로 대선을 치르면서 분위기가 전과는 딴판이었다”며 “반정부 인사들을 만나 설득해 시위도 없었다”고 말했다. 반 총영사는 오 회장의 협조를 얻어 동포사회의 환영 분위기를 잘 이끌며 이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91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의 2차 방미를 앞두고 워싱턴한인사회는 다시 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엉뚱하게 대사관이 환영위원장 자리를 놓고 과욕을 부린 것이다. 이도영 워싱턴한인회장 대신 최광수 수도권메릴랜드한인회장이 환영위원장을 맡도록 추진하면서 한인회와의 불화는 노골화됐다.
IMF 김대중과 탈 권위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1월 워싱턴행에 올라 앤드류스 공항에 당도했다. 대한민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는 초유의 국난기였다.
나라가 어려운 만큼 리셉션도 약식으로 치러졌다. 호텔 대신 대사관저로 장소가 바뀌었으며 음식도 간단하게 준비됐다. 협소한 장소 관계로 초청 인사도 500명이 채 안됐다. 김성래 워싱턴한인연합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은 나라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해외동포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이날 리셉션에는 LPGA에 막 데뷔해 US 오픈 우승이란 쾌거를 이룬 박세리와 유리시스템을 매각해 거부의 반열에 오른 김종훈씨 등도 초청돼 눈길을 끌었다. 리셉션은 그러나 초청 인사 선정을 두고 논란에 휩싸였다. DJ가 설립했던 한국 인권문제연구소의 이영작 소장이 주도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무성한 말을 낳았다.
DJ의 방미에도 시위대는 없었다. 다만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열리는 백악관 앞에서 조병웅씨가 1인 시위를 벌였다. 전두환 방미 당시 청와대 경호원들과 격투를 벌인 조씨의 변화였다. 그는 ‘김대중은 고등간첩’이란 팻말을 들고 자리를 지켰으나 주목받지는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는 탈권위주의 시대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5월13일 생애 처음으로 워싱턴을 찾았다. 앤드류스 공항에는 별도의 환영인파 없이 한승주 대사, 한인회장, 평통 회장 등이 영접을 나갔다.
리셉션은 이날 오후 5시30분 캐피탈 힐튼호텔에서 45분간 열렸다. 행사장은 공간에 비해 너무 많은 1천명이나 참석해 무질서하게 보일 정도였다. 실내의 공기가 더워지자 땀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원고 없이 22분간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과 한미 현안, 재외동포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유머를 섞은 논리정연한 입담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노 대통령은 “한국에서 떠날 때는 걱정이 한 보따리였는데 오늘까지 일이 잘 풀려 성공적이었다”며 “이는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미국 동포분들의 노고가 뒷받침된 것”이라고 동포들에 감사를 표했다. 또 반미문제등 재미동포들의 당초 우려와는 달리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연설을 채워 열기를 이끌어냈다.
이날 리셉션은 시대의 변화상도 실감케 했다. 참석자들의 상당수가 디지털 카메라를 지참해 경쟁적으로 노 대통령을 찍어댔다. 과거 같으면 경호 문제로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참석자들은 “권위주의 시대가 가긴 갔나 보다”고 한마디들씩 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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