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 민주당 경선을 치르는 동안 ‘준비된 후보’라던 힐러리 클린턴도 예기치 못했던 악재에 부딪쳤었다. 린든 B. 존슨대통령의 민권법 서명 업적을 치하하려던 것이 마틴 루터 킹목사 폄하로 와전되는 바람에 흑인들의 분노를 샀고, 퍼스트레이디의 외교 경험을 과시하려던 ‘저격 위험을 무릅쓴 보스니아 방문’ 언급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면서 불신과 야유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지난 주말에 부각된 또 하나의 악재, 일부 민주당 인사들의 사퇴 압력은 악재 보다는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엊그제 펜실베니아 유세장으로 들어오는 힐러리를 향해 한 여성 유권자가 소리쳤다.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절 도와주시면 마지막까지 갈 것입니다!”
지난 주말 유세현장의 기자들은 아직도 한 달이나 남은 인디애나의 선거열기가 지나간 어떤 경선지에서 보다 뜨겁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대선후보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한표다운 한표를 행사한다는 기대감이 대단했고 힐러리 사퇴 촉구에 대한 분노 또한 거셌다.
힐러리를 보기위해 90마일을 운전해 달려와 쌀쌀한 날씨 속에 5시간째 기다리고 있다는 70세 은퇴 간호사는 반응을 묻는 기자들에게 호통 치듯 말했다. “결단코, 절대로 사퇴해선 안되지요. 힐러리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후보이고 우리들의 지지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단 말입니다”
연단에 등장한 힐러리는 관중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에게 경선을 끝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우, 노우, 노우!” “그러나 우린 계속 할 것입니다. 펜실베니아에서 인디애나, 푸에르토리코까지 아직 투표를 못한 수백만 유권자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속에 선 힐러리는 유권자들을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하는 ‘투사’의 모습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자신을 코너로 몰려던 사퇴 촉구를, 앞으로 남은 경선지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려는 워싱턴 인사이더들의 부당압력으로 규정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공화당은 어제부터 벌써 부통령후보 인선작업에 착수했으니 민주당 지도부의 고민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두 후보의 과열된 경선이 너무 오래 끌면서 백악관 탈환이 무산될까 조바심치는 우려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길어진 경선은 후보의 탓이 아니다. 제도의 탓이다. 가장 민주적으로, 당의 철학까지 반영해 만든 제도의 규정을 충실히 지키며 필사적으로 뛰고있는 후보에게 너무 오래 끌었으니 그만하라는 압력은 부당하고 무례하다. 더구나 해리 리드 상원 원내대표나 하워드 딘 민주당 전국위원장 등 중도적 입장을 지켜온 리더들도 아닌, 버락 오바마 지지를 선언한 상원의원들이 공개적으로 힐러리의 사퇴를 촉구한 것은 지지자들의 분노를 충분히 살 만하다.
현재의 여건을 하나씩 짚어보아도 힐러리가 아직은 사퇴해야할 이유가 없다.
우선 판세가 그렇다. 현재의 승리확률은 오바마가 확실히 높다. 확보한 선출 대의원 수도 약130명이 더 많고 득표수로도 70만표 앞서있다. 그러나 70만표는 전체 유권자의 1%에도 못미치는 숫자이며, 중도사퇴 없이 전당대회까지 계속되었던 1980년과 84년 민주당 경선 후보들의 대의원 차이는 600~1,000명에 달했었다. 현재 제외된 플로리다와 미시간 주에선 힐러리가 36만표나 더 앞서있는 상태이며 그동안 ‘민의에 따르라’는 압박을 받아온 수퍼대의원들에겐 요즘 당 리더들이 연달아 ‘주관적 판단을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4월과 5월 경선이 실시될 5개주 중 4개주에서 현재론 힐러리가 우세를 보이고 있다. 어떤 후보가 이런 상황에서 싸움을 포기하겠는가.
아직 민주당 경선은 ‘지겹다’ 보다는 ‘흥미롭다’에 속한다. 앞으로 남은 10개주 경선지의 민주당 신규 유권자등록은 계속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펜실베니아의 경우 지난 5개월 사이에 16만명이나 늘었다. 이번 주말 몬태나에선 민주당 디너가 열린다. 보통 600명 정도가 참가하는 연례모금행사다. 금년엔 1,500명이 신청, 주최측이 싱글벙글했는데 힐러리와 오바마가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5분이 채 안돼 2,500장의 티켓이 날개돋힌듯 팔려나갔다.
힐러리와 오바마의 익사이팅한 대결은 아직 민주당엔 ‘실’보다 ‘득’쪽으로 기울어진다.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 캠페인은 요 며칠 상당히 자제되고 있지만 사실 공격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나치면 독이 되지만 정도를 조절하면 약이 될 수도 있다. 본선에서 훨씬 강하게 쏟아질 공격에 대한 내성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당분간 힐러리에 대한 사퇴압력은 약화될 것이다. 금년 선거가 유난히 예측불허의 경향을 보이기도 하고, 열심히 뛰고있는 선수에게 나가라니,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를 신조로 삼는 미국인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
본선에서의 민주당 유권자 이탈을 걱정한다면 오바마 지지인사들이 해야할 일은 따로 있다. 그들의 예상대로 오바마가 후보가 된 후의 대책이다. 힐러리 지지자들를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 힐러리에 대한 열성이 그대로 오바마에게 옮겨갈 수 있도록 이들을 끌어안을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섣부른 중도사퇴 압력은 힐러리 지지자들을 매케인에게로 쫓아버리는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 진짜 걱정해야할 본선에서의 경쟁력 약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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