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모든 자연과 사람은 자기의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자연이고, 조화이고, 창조의 질서였다. 그 우주를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은 종들을 세웠다. 그 종들이 천사였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부리는 영들이었다. 그런데 그 천사 중 하나가 자기의 자리를 잊고 말았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What are you doing now?)”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질문은 “사람이 누구이냐?” 라고 하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이 철학의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사람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알고자 하는 그 사람도 결국 그 자신 자체가 오류와 혼돈 속에 갇혀 있기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 알게 된다면 세상을 알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면 사람이 누구인지 터득하게 된다. 그러기에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는 말이 나오게 된 모양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 ‘부활’에서 인간이 누구냐 하는 것을 말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주려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근대의 문학 선지자였다. 그는 사람은 비록 악하다고 하더라도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으며, 또한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지 아니하는 선의 상태를 유지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기에 사람은 자기의 선을 자랑할 수도 없으며, 죄를 정죄할 수 없다. 이러한 두 가지의 갈등 속에서 사람이 늘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은 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 선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용서해주는 것이다. 그 사랑과 용서는 나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더불어 사는 그런 행복한 세상이었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인생관이고, 그의 행복론이고, ‘부활’이라는 작품에서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부활’에 나오는 카츄사의 모습은 추하고 천하였다. 그녀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네프류도프라는 사람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네프류도프는 귀족이었고 카츄사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이 둘의 사랑은 온전할 수 없었고, 결국 카츄사는 네프류도프로부터 버림을 당하였다. 그 후 카츄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절망과 타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는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누구나 자기의 선은 자랑하고, 다른 사람의 악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살기 힘든 경제 불경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이런 경제적인 어려움이 나라의 정치나 경제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책임을 돌린다. 그래서 지도자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서 새로운 지도자에게 그 무게를 실어준다. 사실 그 어떤 것도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도 내가 밟고 있으며, 이 공기도 내가 마시는 공기이며, 내가 뱉어낸 공기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모두 다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모든 것에 크고 작은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카츄사의 그 초라한 삶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프류도프로 인해 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네프류도프의 마음에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카츄사의 인생에 새로운 희망과 변화를 주려하는 부활의 의지를 삶의 목표로 삼으려고 했다. 그 부활은 자기의 양심의 부활이었고, 자기 자신의 부활만 아니라 상처와 행복을 잃어버린 카츄사의 부활이기도 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What are you doing now?)” 라는 질문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이 아니다. 그 질문은 불의의 길에서 정의의 길로, 상처와 미움의 늪에서 치료와 사랑의 들판으로, 비판과 정죄의 가시밭길에서 이해와 용서의 바다로 나오라는 창조의 원래의 자리, 자연의 질서로 회복하라는 묵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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