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저자 태안만려
우리 삼국사기에 웅진으로 천도하고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곤지왕이 일본서기에서는 형님인 개로왕의 아내(임신중)를 모시고, 또 삼국사기에서 행방불명이 된 왕의 신하 木協萬致(목협만치)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 너간 기록과 유적의 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곤지왕의 신사가 있는 태자정 일대에는 600개가 넘는 고분들이 있는데 1963년 여름, 이 고분 중 하나에서 금은제의 화려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일본 고고학상 불가사의한(당시 왜인들의 금속 세금술이 미천)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것은 1971년 7월5일 우리나라 고고학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충남 공주에서 한 처녀분이 발견될 때까지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었다. 공주에서 발견 된 그 처녀분은 무령왕의 능이었고 여기에 서 쏟아져나온 금, 은 제품이 곤지왕 신사가 있는 태자정 일대의 유물들과 꼭 같은 세공술로 만들어진 동류, 동시대의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곤지왕을 따라 임신한 몸으로 망명길에 올랐던 개로왕비는 그 망명길에서 분만하였으니 이가 곧 훗날의 무령왕이었고 작은아버지 곤지왕과 불교의 힘으로 정권을 찬탈한 목협만치, 즉 소가 일족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합니다. 훗날 왕통을 이어받기 위해 웅진으로 돌아와 왕위에 오릅니다.
‘꽃잎은 지지만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723년 7월 6일 금불상 하나를 손에 꼬옥 쥔 채 숨을 거둔 안만려, 712년 ‘고사기’를 찬록하고, 이어 8년의 장정을 거쳐 공저함으로 30권의 ‘일본서기’와 ‘계도’ 1권을 내놓았던 태안만려가 가족도 없이 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왜 그는 철모르는 4살 때 어머니가 숨을 거두며 물려준 가보를 움켜쥐고 숨을 거두었을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다신부, 황산벌 결전장에서 계백장군과 함께 마지막으로 운명한 그날을 전후하여 태어났기에 얼굴조차 마주친 적이 없고, 어머니마저 663년 백강구(백강촌: 금강입구) 전쟁에서 패한 왜군 패잔병의 회군선에 수많은 유민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오는 뱃길에서 운명하신 것이 4살 때였으니 무엇을 얼마나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이 일행 중에 어머니의 병을 진단하며 운명을 지켜본 억례복류 내외가 4살박이 안만려를 맡아 그의 할아버지를 찾아주었는데 그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그 금불상을 할아버지께 보여줌으로써 아들 다신부와 며느리 온사녀의 자식임(자신의 손자)을 증명하였던 그 금불상, 안만려가 최후의 순간 그 금불상을 움켜쥐고 운명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제말기 대동아전쟁이 승전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일본조정은 느닷없이 백제의 고도 부여에 신궁을 짓겠다며 조선총독부에서는 대로를 건설하며 부소산 기슭의 신궁 터까지의 토목공사를 끝내는 한편 이미 자신들의 식민지인 대만으로부터 향이 특별하고 단단한 회나무를 날라왔으며, 석재들을 긁어모았는데 그러는 중에 종전되어 신궁 건축도 그것으로 중단되고 말았습다. 해방 이듬해에 그 쌓아놓은 돌무더기 속에서 한 비석이 나왔는데 바로 사택지적비였던 것이며 이 비문을 쓴 사람이 곧 사택소명이었습니다. 일본은 무엇 때문에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 신궁을 축조하려 했는가,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입니다.
667년 천지천황이 천도하고 불과 5년, 천지천황이 그곳에서 죽었고 태자 대우왕자가 제39대 홍문천황이 된지도 불과 몇 년, 672년 7월22일 임신의 난 최대의 격전지 세다(瀨田)의 다리 위의 격전장에서 근강군이 아스카(飛鳥)군에게 패망함으로써 대진궁이 불에 타고 백제의 유민이 뿔뿔이 흩어지고, 백제의 뿌리가 철저하게 뽑혀 나가고, 감추고, 만들어내고, 깎아내고 덧붙인 일본 독립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백강구 전투의 패전으로 나라를 잃고 건너온 수만의 백제인들은 희망과 꿈을 안고 피땀 흘려 일구었던 삶의 터전이 불과 5년 만에 조각나고 뿔뿔이 흩어져버린 곳, 그리고서는 철저하게 백제의 족적을 감추고 왜인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유민의 신세, 오늘날 한국의 후손임을 감추고 살아가는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 대진궁이 있던 자리가 흔적도 없다가 소화 49년 주택건설 기초공사 때 대진궁의 회랑의 흔적이 발견 되어 발굴조사를 하였고, 그 후 사적, 근강 대진궁 금직유적(史跡, 近江大津宮錦織遺跡)이라는 기록을 게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전부라면 이 또한 미스터리가 아닌가. 역사의 사적 관리 및 기록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철저한 그들이 왜 이러한 사료들을 1300년 이상 방치 혹은 은폐시켰을까? 천지천황 때의 백제의 망명 유민들이 일본에서 얻은 벼슬들을 살펴보면서 천무가 전쟁을 승리한 뒤의 상황을 비교해 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까요.
귀실집사(복신의 아들로 오늘날 문교부 장관 겸 국립대학 총장격)는 학직두(學職頭)에 사택지적비문을 쓴 사택지적의 아들 사택소명은 관리들의 인사를 장악하는 법관대보(法官大寶), 여자신은 대금하(大錦下), 궁의 요직을 맡은 곡나진수, 훗날 시의가 되는 억례복류 등 관위를 받은 백제 유민들은 70명을 넘고 있어 역시 불가사의한 또 하나의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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