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국도 1호 竹內街道
“‘일본서기’에 근거해서 ‘南鮮經營(남선경영)을 기정사실로 전제’되어야 한다면 왜인들이 수백 년간을 남부조선을 지배했었다는 결론인데 그랬다면 남한에서 이들이 사용했던 유물과 유적이 마땅히 발견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일합방 후 일본 사학자들이 유적(유물)들을 찾아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나 森浩一 교수의 지적처럼 한반도에서는 일본열도계의 유물 유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일본 열도에서는 수만 점의 한반도계 유물 유적이 발견되었다…”
“일제 사학자들이 백제 시조를 太田亮(태전량)은 13대 근초고왕으로, 津田左右吉(진전좌우길)과 今西龍(금서룡)은 12대 契王(계왕)으로 보았고 이병도는 8대 고이왕으로 보았다”-김성호 님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 기원’에서 발췌. 이렇게 되면 백제의 건국은 기원전 18년이 아닌 서기 344년의 계왕이 시조가 되거나 346년의 근초고왕이 시조가 되겠고 이병도의 8대 설은 서기 260년의 고이왕이 건국했다는 것인데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백제의 기원을 불신하는 것으로 곧 역사를 가벼이 여기고 농단하는 일입니다.
경성제대의 사학교수로 재직(1924~1932)하면서 단군신화의 말살을 비롯하여 초기기록 불신에 큰 업적(?)을 남겼던 今西龍(금서룡)의 주장을 보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기에서 契王(계왕 AD344~346)까지의 기사는 전혀 신용할 수 없다. 계왕 이전의 기사는 백제 중세에 製作粉飾(제작분식)된 것이, 억지로 역사의 체제로 갖추어져 삼국사기에 그대로 수록된 듯하다. 근초고왕(346~375) 때에 이르러 그 이름이 일본기에 보인다” 契(계)왕 이전의 기사는 신용할 수 없으니 불신되어야 하고, 근초고왕은 ‘일본서기’에 기재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망연자실, 남의 나라의 역사를 마음대로 농단했던 이들도, 이에 빌붙어 자기나라 역사를 가벼이 여겼던 이들도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이 돋습니다.
각설하고 김성호의 ‘문헌기록과 인류학적 현상’이라는 내용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고대사회를 복원함에 있어서 문헌기록만이 史料(사료)의 전부가 아니다. 고고학, 언어학, 체질학, 지명학 등을 포괄하는 인류학적 사료도 문헌기록 못지않은 중요한 사료이다”고 전제하면서 일본서기의 南鮮經營(남선경영) 기사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오히려 한반도의 고대집단이 일본열도로 건너갔다는 논리로 1957년 大野晋(대야진) 교수의 ‘일본어의 기원’을 예로 든다. “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 사이에 일본어의 대 전환이 일어났는데 이때 남부 조선어가 전래 되었다” 반도 남부지역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은 바꿀 수 없는 체질학적 근거이다, 또 小林行雄(소림행웅) 교수는 天皇家(천황가)가 성립된 畿內地域(기내지역: 京都(경도). 奈良(내량일대)의 주민은 기이하게도 ‘한국인적 체질’임을 지적했고, 上田常吉(상전상길) 교수는 기내인의 신장은 161~163cm로서 한국인 가운데 가장 키가 작은 충남, 전북인들과 동일함을 지적했다. 즉 남부조선의 대 집단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지 않고서는 충남, 전북, 畿內(기내) 사이에 이러한 인류학적 연관 현상이 나타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위 일본의 실크로드라 할 수 있는 국도 제1호는 오사카에서 二上山(이상산)으로 건너가는 좁은 길, 좁아서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그럼에도 일본 사람들은 이 길을 함부로 넓히려 하거나 도시계획을 하지 않는 길, 단순한 길이 아닌 역사적으로 유래 깊은 길, 사람에 의해서 일본 최초로 개척 된 길, 이 길을 통해서 문명과 문화와 종교 그리고 문자와 기술이 들어온 성스러운 길 바로 실크로드입니다. 동양의 실크로드가 온갖 풍물들이 서양으로 건너가고 서양의 문물과 과학문명이 오가며 교류를 이루었다면 일본의 이 실크로드는 백제의 그 찬란하던 문화와 고도의 기술과 불교와 문자가 아직 야만과 미개의 일본을 깨우며 일방적으로 흘러 들어갔던 일방로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이 길의 이름을 竹內街道(죽내가도)라 부른다. 이 죽내가도는 오사카의 바닷가에서 좁고 굴곡이 심한 이상산 산정을 넘으면 일본의 고도 아스카와 나라의 평원이 펼쳐 보인다. 이 길이 죽내가도로서 일본의 국도 1호이며 이 길을 개척한 사람들은 백제인이다”
오늘날 서울의 강남과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떨쳤던 한성백제(漢城百齊)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왕도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죽게 합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선대로부터의 치욕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던 중, 도림(승려)의 계략과 백제 개로왕의 어리석음으로 백제는 토목공사(성, 제방, 궁전 등)에 국고가 고갈되고 민심은 흉흉하게 되었으며 이때를 틈타 장수왕은 대대적인 백제 공격에 나섰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끝내는 개로왕이 죽으면서 강성한 한성백제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457년 한성백제의 멸망으로 엄청난 숫자의 유민들이 난을 피해 피난을 떠나는데 한쪽은 오늘날의 공주, 다른 한쪽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엄청난 유민들의 대이동이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이들이 죽내가도를 따라 북상하였고 오사카의 이상산으로 나아가 큰 세력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들이 무리지어 살던 곳은 오사카 외곽지대인 太子町(태자정), 바로 그곳입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