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天原은 거창 가조면
대체적으로 일본의 역사는 ?文文化(죠몬문화), 彌生文化 (야요이문화), 古墳時代(고분시대), 飛鳥文化(아스카문화: 스이코조) 등으로 발전합니다.
야요이문화(BC 200~AD 300년)는 일본의 농경문화가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한반도로부터 북부 큐슈에 전래된 벼농사와 금속기문화는 열도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나라가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죠몬 토기를 대신해서 야요이 토기가 이용되어 야요이 문화라 합니다.
야요이 중기가 되면 100여 개의 작은 나라들이 생겨나고 이 나라들이 30여 개의 나라로 이합집산 되는데 야마이타국의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여왕으로 추대됩니다.(약 230년 경)
그 후 3세기 말에서 7세기 초까지의 시대를 고고학에서는 고분시대라 부르고, 문헌학상으로는 야마토(大和) 시대라고 합니다.
신화만 보더라도 스사노오(가야의 마이너그룹)는 야요이(彌生) 시대를 주도했으며 부여(백제)의 아마테라스는 고분시대(야마토시대, 大和倭)를 주도하는 것입니다.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의 강림신화(천손 강림신화) 부분은 단군신화와 유사할 뿐 아니라 그 내용은 가야의 신화와 흡사하여 단군신화와 가야신화를 합쳐놓은 형태입니다. 예를 들면 “니니기가 하늘로부터 다카치오(高千?) 산의 구지후루다케(久土布流多氣) 봉우리에 내려왔다… ‘여기에 나라가 있는가’라고 물어보자 그곳의 우두머리가 ‘나라가 있으니 천손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일본서기 신대 하 9)
어떻습니까. 가야신화와 龜旨歌(구지가)가 생각나시지요. “龜旨(구지) 봉우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누가 있느냐’라고 물으니 몰려 있는 사람들이 ‘저희들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로 시작하는 가야신화 말입니다.
그리고 일본왕가의 사학자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는 “일본신화는 가야신화와 흡사하며 연고가 깊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가장 먼저 나오는 지명이 있는데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다카마노하라(高天原)에 앉아서”라 합니다. 그 고천원은 태초의 일본 신들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데 국어 학자(한국지명학회 회장) 김종택 교수는 이 고천원이 한국 경상남도 거창의 가조면이라고 단언합니다. 아직도 가조에는 궁궐터가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지명(궁배미)이 있다는 것 등을 예로 듭니다.
당시 이 지역은 동쪽은 신라(사로국)가, 서쪽은 가야연맹이 있었는데 남부에는 금관가야(김해)와 고령가야(진주)가 있었고 북부에는 대가야(고령)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거창에도 가야연맹의 소국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2, 3세기에는 금관가야가, 5세기에는 대가야가 중심이 되어 번성합니다. 따라서 흔히 牛頭 天皇(우두천황: 소머리천황)이라 불리기도 하는 스사노오는 가야계이긴 하나 주류가 아닌 비주류(마이너 그룹), 즉 방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소의 머리와 모습이 비슷하다 하여 牛頭山(우두산: 봉우리는 牛頭奉)이라 불렀고 우두산이라 불렸던 곳은 가야산 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료들이 편견으로 치부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의 한심한 타령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아래의 일본서기 기사내용을 살펴보면서 한번쯤 묵상해볼 일입니다.
-崇峻(숭준) 전기(587년) 6월 21일 善信阿尼(선신아니) 등이 大臣(蘇我馬子)과 이야기하며 “출가의 도는 戒(계)로써 본을 삼습니다. 백제에 가서 계법을 배우려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달 백제의 사인이 왔다. 대신(蘇我馬子)이 사신에게 일러 “이 여승들이 계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대의 나라에 데리고 가서 계법을 다 배웠을 때 출발 시키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백제 사인이 대답하기를 “본인 등이 귀국하여 먼저 국왕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후에 출발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 고 하였다…
-皇極(황극) 4년(645년) 6월12일 大極殿(대극전: 법흥사의) 고인대형(고인대형)이 옆에 있었다. 中信鎌子連(중신겸자연)은 蘇我入鹿(소아입록)이 평소 의심이 많고, 주야로 칼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익살꾼을 시켜 속여 칼을 풀게 하였다…
두 곳의 기사를 옮겨 왔으니 그 전체의 뜻은 이렇습니다. 대화왜의 통치구조는 백제왕- 대화왜에 파견된 백제관리- 蘇我(소아)의 명령계통에 따르는데 이 소아 마자가 백제에서 파견된 사인에게 대화왜의 비구니들을 데리고 가줄 것을 간청하나 거절당하고 귀국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데리고 간다는 기사입니다. 이어서 이 소아 가문 4대 가운데 첫 번째인 稻目(도목: 536년) 두 번째 소아 馬子(마자: 572년) 세 번째 蝦夷(하이: 642년)는 비교적 백제의 명을 잘 수행하며 대화왜를 경영하였으나 네 번째인 入鹿 (입록)은 대신으로 임명 받지도 않고 스스로 대신의 행세를 하였는데 그 위세가 父인 蝦夷(하이)보다 강하였다고 합니다. 588년과 589년에는 백제관리 恩率首信(은솔수신)이 파견되었고 631년부터는 백제왕자 풍(요기)이 파견되었습니다.
결국 아들 입록의 방자함(백제왕에 반역, 대화왜왕으로 행세하였음)을 막지 못한 아비 蝦夷와 자식 입록은 백제왕의 주살 영(令)에 의해서 가마다리(鎌足)가 행동대원 佐伯連子麻呂(좌백연자마려, 백제인), 葛城維犬養連網田(갈성유견양연망전, 백제인) 등이 그들 부자를 주살(645년)하게 됩니다. 일본서기에는 태자 중대형이 주살하였다고도 기록 하고있습니다만(위 일본서기 인용문 후자는 중대형이 입록을 주살하기 전 무서워 떨며 무장해제 시키는 장면, 결국 중대형이 그를 주살하지 못하고 떨고만 있는 것을 백제인, 또는 풍이 단칼에 베었다고도 함) 日本書紀通釋에는 ‘謂因韓政而誅’ 즉 한국(백제) 정치가 죽였다는 기록이 그 때의 정황으로 더 신빙성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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