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에게 한 사람이 “왜 귀는 둘을 만들고, 입은 하나만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조물주는 지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남의 말은 둘로 듣기에 부족하고, 말할 때는 하나로도 충분하기에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하루 동안에 우리의 모든 신체의 부분이 움직인다. 입도 다른 기관과 못지않게 부지런히 움직인다. 먹을 때 움직이고, 말할 때 움직인다. 금식을 할 때 보면 먹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입이 얼마나 심심한지 모른다. 입이 할 일이 없어진다. 말을 하지 않고, 먹지 않고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어느 조그만 마을에 작은 교회를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계셨다. 동네에 한 처녀가 거할 곳이 없어 그 처녀를 목사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했다. 그 처녀가 어느 날 목사의 집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 후 몇 달을 지내다가 훌쩍 목사님의 집을 떠나고 말았다. 떠난 후 다시 돌아 올 때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은 그 처녀의 아이가 분명 목사님의 아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럴 법도 했다. 목사님의 집에서 처녀가 살았으니 그 아이가 당연 목사님의 아이라고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교인들이나 동네 사람들은 목사에 대해서 비난할 뿐 아니라 목사를 교회에서 사임하게 했다.
목사님은 그 때 아무런 변명이나 설명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사람들의 결정대로 따랐다. 사임한 목사는 특별한 재주나 기술이 없지만 아이를 품에 안고 젖동냥하기도 하고, 시장에서 품팔이를 하며 아이를 정성껏 키웠다. 몇 년 지난 후에 그 처녀가 험상궂은 청년과 함께 동네를 찾아 왔다. 그리고 목사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것을 본 동네사람들은 목사님 집 문 밖에서 무슨 일인가 하고 기웃거렸다. 처녀와 청년은 목사님에게 그들이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아이를 달라고 했다. 그 아이는 자기들의 아이라고 했다. 목사님은 그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 아이를 그들에게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목사님께 물었다. “왜 그 당시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고 변명하거나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 때 목사님은 대답했다. “그 때 아무리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누가 내 말을 믿었겠습니까? 나는 오직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그것으로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침묵이 사람을 얻고, 침묵이 믿음을 가져다 주게 된 이야기이다.
세상에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입을 열고 닫는 일이다. 한번 뱉은 말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입은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은 얼마나 조심스런 일인지 모른다. 이해인 님의 ‘말을 위한 기도’에서 이런 시어가 있다.“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 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것을 안 이발사는 그 말을 속 시원히 말하고 싶었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해서 시름시름 병이 들고 말았다. 그래도 죽기 전에 대나무 밭에 가서 소리를 내어 외쳤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이발사는 후련하게 말하고 죽고 말았다.
말은 시원하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생각과 내 감정대로 마음대로 나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 응어리진 부분을 토해 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대 그럴수록 나도 마음이 편지 않고, 그 말을 듣는 사람도 편치 않게 된다. 거의 그런 결과가 생긴다.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긴다. 그러기에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하며,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끈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비판을 받아도 변명하지 말고 행여 마음이 상하더라도 맞서지 말며 빈 가슴에 환한 미소를 채워 이웃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설령 부부끼리 다투더라도 서로 “여보 당신멋져!”라고 인정해야 한다. 첫글자를 풀어 헤치면 이렇다.“여유롭게, 보람차게,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자!”
침묵이 최선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침묵의 도는 있어야 한다. 침묵이 처음에는 오해와 궁금증을 주더라도 나중에는 이해와 용서와 화평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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