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申의 전쟁
“신라의 김춘추가 머리를 조아려 받아낸 당과의 군사협력으로 백제를 공략하여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당나라는 백제의 영토를 신라에 돌려주지 않고 백제에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두어 676년까지 그곳을 통치하였으며, 백제왕 풍이 백제의 마지막 저항전쟁(663년)에 패하여 고구려로 도망가고 풍왕의 두 아들 忠勝 왕자와 忠志 왕자가 항복하자 664년 筑紫(축자)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672년까지 백제 본토를 통치하듯 백제인을 앞세워 大和倭를 통치하였다(당나라 진장의 군대 주둔)”
또 “668년 고구려가 항복하자 이번에는 그곳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676년까지 그 지역을 통치하였으니 신라로서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막상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백제와 야마토왜, 그리고 고구려를 무너뜨리고서도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격분한 신라(문무대왕)는 당나라에 사죄사를 보내는 한편, 다른 한 편으로는 백제에 남아있는 당의 군대를 축출하여 백제의 땅을 병합하였으며, 백제가 병합되자 신라는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672년 친당 정권인 近江측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 신라계 정권인 天武 정권을 수립하였다(672년 5월 12일, 당나라 및 백제 대리관리인들이 축자 도독부를 철수하고 1개월 10일이 되는 날에 壬申(임신)의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미루어 신라가 이 때를 기다린 것으로 믿어진다)”
“그 후 신라는 일본이 664~672년 5월까지 당의 筑紫都督府(축자도독부) 치하에 있을 때 일본에 수립된 당의 복식과 놀이를 금지함과 동시에 일본의 모든 문물제도는 신라의 것으로 따르도록 하였다”
위 친당 정권인 근강을 물리치고 친 신라계 천무 정권을 수립했다는 전쟁이 임신 전쟁입니다. 그 전쟁의 기록을 먼저 옮기며, 좀더 구체적인 전쟁의 실상은 후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임신의 전쟁은 신라가 김갑실 장군을 보내 일으킨 것이며, 天智(近江)편 사령관은 백제의 장군 壹伎史(일기사)이고 天武(천무)편 사령관은 신라 장군 金押實(김압실)로서 660년 한반도에서 시작된 신라와 백제의 대결은 12년 후인 672년 일본에서 다시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일본서기의 기사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왜곡됐는지를 잠간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기사 중 여러 곳에 近江(근강)측 사령관의 국적이 나타났는데 ‘近江의 將師(장사:사령관)인 壹伎師(일기사)는 한국의 장수이다. 즉 近江將壹伎史 韓國之帥也(근강장일기사 한국지수야)라고 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 해설자는 이 기사는 ‘계도 자체에 후세의 조작이 있다고 생각되어 신용 할 수 없다’는 평을 내리고서 “近江의 將壹伎史韓國이 師이다”라고 해석하여 일반 독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誤譯(오역)하였음은 물론 맨 끝에 오는 帥(수)를 師로 바꾸어 의미가 통하지 않게 하였다. 또 마땅히 일기사의 한국군과 葦池(위지) 변에서 싸웠다 라는 문장도 壹伎師韓國(일기사한국)이 軍과 葦池(위지)변에서 싸웠다”라고 왜곡하여 의미가 통하지 않게함으로써 사실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천지 3년(664.문무 4) 5월17일 백제의 鎭將(진장) 劉仁願(유인원)이 郭務悰(곽무종) 등을 파견하여 表函(표함: 上表文을 넣은 상자)과 獻物(헌물)을 진상하였다” 는 일본서기의 기사 내용은 “… (전략) 백제의 鎭將(진장:백제 주둔 당나라 총사령관) 유인문이 곽무종 등을 파견하였다. 10월1일 가마다리(鎌足)는 스님 智詳(지상)을 보내 물품을 곽무종에게 선물했다” 의 윤색이며 “10월 4일 곽무 종 등에 향응(잔치)을 下賜(하사) 하였다” 는 “… 곽무종 등에 잔치를 베풀었다” 의 윤색이며, 원문은 생략하나 윤색의 정도가 특히 심한 내용은 ”백제주둔 당의 총사령관 진장의 지시로 군대를 거느리고 일본에 진출한 곽무종을 일본서기는 곽무종이 일본에 와서 일본 왕에게 表函(표함)과 헌상물을 바치고 그곳에서 天智王이 별세 했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상복을 입고 세 번 곡하고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는 기사일 것이다. 이 기사는 당의 일본 진출을 근원적으로 은폐하고자 꾸며낸 기사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선물이 헌물을 진상하였다거나, 향응을 베푼 것을 잔치를 하사하였다는 식의 윤색 정도는 비일비재, 그러나 진실이란 영원히 묻히고 마는 일은 없습니다.
그들이 윤색. 왜곡한 그들의 역사의 가면은 이제 하나하나 벗겨지고 있습니다.
“신라가 친 신라계 천무 정부를 세우고 우선적으로 시행한 것이 당의 복식과 놀이를 금지하고 일본의 모든 문물제도는 신라의 것으로 바꿀 것을 지시하였다”는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겠으나 이쯤에서 임신의 전쟁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본서기는 임신의 전쟁을 天智(천지)와 天武(천무) 형제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660년 백제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항복한 후 帝明(제명)천황이 백제 무왕의 조카인 福信(복신)의 지시에 따라 북구주로 달려가서 백제 부흥을 위한 군사와 무기를 준비한 점을 고려할 때 제명과 천지는 백제계이고 천무는 신라계임이 더욱 확실해진다”(최재석의 ‘고대한일관계와 일본서기’)
위 발췌문 중 “천지와 천무 형제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의 내용을 형제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되겠기에 필자의 견해를 부언합니다.
그들은 형제입니다. 제명천황의 아들들로서 天智(重大兄)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을 형이고 天武(大海人)는 둘째, 즉 천지의 동생입니다. 형제가 분명하지만 천지는 어머니 제명천황의 유지를 받들어 어머니가 준비해놓은 병사들과 병장기를 복신에게 전달하여 백제의 풍왕이 백제부흥전쟁을 하도록 하였고 제명천황이 죽자 어머니의 유지인 백제부흥을 이룩하지 않고는 왕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며 상복 또한 벗지 않겠다는 백제계이고, 이에 반하여 형에게 불려간 아내를 기다리며 참을 인자를 수십 번씩 쓰면서 분노(후에 기회가 되면 배경설명을 하도록 하겠음)를 삭이는, 어쩌면 분노를 쌓아갔다고 보아야 할 천무는 형이 어머니를 따라 규슈에 나가있는 동안 나니에에 남아 출병을 반대했던 세력들을 규합하고 주민들을 자기 지지세력으로 키우면서 욕망의 날개를 펼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그래서 형 천지와 같은 배를 탈 수 없는 신라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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