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 /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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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졌다. 보통사람이라면 이 놈의 돌부리가… 하면서 돌을 걷어차 애꿎은 발가락까지 다치거나 재수 없게 왜 하필 나한테… 하면서 온갖 원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참사랑의 실천자라면 나한테 걸렸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랬기에 망정이지 그냥 지나갔더라면 이게 여기 있는 줄도 몰랐을 것 아니냐,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또 걸려서 넘어지고 다칠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고 <그 돌부리를 치워준다, 마치 아이들이 뛰노는 풀밭에 독사가 도사리고 있을 경우 혹시 물릴까봐 피해버리지 않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대신 쫓아주듯이.> 이와 같이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장애를 도리어 타인을 생각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는다.
그렇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밝아지듯이, 참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장애가 클수록 그 장애를 뛰어넘고자 하는 서원은 더욱 굳건해지고 서원이 굳을수록 온갖 장애를 뛰어넘을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고 했던가.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성현들의 발자취를 보면 거의 예외없이 보통사람들로선 실제경험은 고사하고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릴(혹은 기가 죽을) 정도로 험한 장애를 이겨냈다. 20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참사랑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예수님은 바로 그 참사랑을 온몸으로 증거하다 반역자로 몰리고 이단으로 낙인찍혀 십자가에 못박힌 채 극한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그로부터 약 600년 전 부처님은 육사외도를 물리치고 참진리를 설파하다 외도의 사주를 받은 여인으로부터 부처님의 자식을 임신했다는 얄궂은 모함까지 받아야 했다.
성현들만 그런 게 아니다.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듯한 우리네 장삼이사들의 일상사 가운데서도 관행이니 대세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막힌 데를 뚫고 얽힌 것을 풀고 비뚤어진 곳을 바로잡으려 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당장은 온갖 저항과 비난과 모함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진위(眞僞) 정사(正邪) 시비(是非)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먼 얘기나 남 얘기가 아니다. 북가주 한인사회에도 그런 예는 드물지 않다.
지난해 미주체전 때 벌어진 몇몇 사례만 해도 그렇다. 미주체전 조직위와 SF체육회 집행부의 편법적 파행운영을 질타하고 정상화에 앞장섰던 SF축구협회 이상호 회장이나 구세홍 사무총장 등은 당시에는 ‘그들과 그들의 우군’으로부터 체전방해니 뭐니 온갖 비방을 들었지만(특히 구세홍 사무총장은 소송까지 당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떳떳하게 다니고 있다. SF축구협회는 ‘그들의 농간’ 때문에 정작 안방체전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곧이어 세리토스협회(8월) LA협회(9월)로부터 자체대회 출전요청이 잇따랐고, 메릴랜드축구협회로부터는 올해 6월 그 협회 주관하에 열리는 미주한인 축구선수권대회 출전요청을 일찌감치 받아놓았다. 지난해 말 LA서 열린 재미축구협회 총회에서는 이상호 회장 등에게 가장 큰 박수가 쏟아졌다고 한다. 총회장에 들른 재미체육회 인사들은 SF축구단 미주체전 출전봉쇄와 관련해 사과성 해명을 했다.
반면 ‘그들과 그들의 우군’은 어느 영화 제목을 응용하자면 ‘체전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사라진 자리가 깔끔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다운 족적을 남겼다. ‘그들’이 지원금 신청을 위해 재미체육회에 올린 예산집행 내역보고서 하나만 공개돼도 그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전임 SF체육회 핵심지도부가 의뭉스런 예산집행과 결산보고 때문에 한인사회의 신뢰를 잃었고 결국 미주체전 부실준비와 파행운영으로 이어진 만큼, 게다가 한때나마 ‘그들’의 병풍역할을 했던 재미체육회 집행부 일각에서조차 혀를 차고 있을 정도인 만큼, 미주체전 결산문제는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고 본다).
바로 이런 자세 때문에 기자 역시 ‘그들과 그들의 우군’으로부터 온갖 모함과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더러는 인터넷에다 더러는 자신이 속한 언론매체에다…. 기상천외한 거짓말을 제조하는 능력과 유포하는 담력이 워낙 대단해서 때로는 그 능력과 담력을 긍정적으로 활용했더라면 그 자신은 얼마나 바르게 살 것이며 사회는 얼마나 더 맑아지고 밝아졌을까 궁금하고 아쉬워질 정도였다.
기자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비틀린 자들의 특권이랄 게 고작 비틀린 언행밖에 더 있겠나, 숨어서 못된 짓을 하고 당사자가 알까봐 시치미를 떼면서 지내는 자들의 신세는 제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냐 처량하겠나, 그러다 자신을 돌아보면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도 있지 않겠나, 하는 판단에서 그냥 무시했다. 때로는 그들 덕분에 기자는 늘 깨어있을 수밖에 없으니 내 자신을 추스르는 데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독사들이 도사린 풀밭을 거닐자면 행여 물리지 않도록 바싹 긴장하고 행동거지를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기자의 대응방식은 기자의 깨어있음을 위해서는 적이 도움이 됐지만 그들의 깨어남을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기자의 증거수집 노고를 덜어주려는 듯 자신들 매체에다 똑부러지게 반복적으로 흔적을 남겨가며 기자를 비방해놓고, 지난해 12월 초 어느 행사장에서 마주친 기자에게 어영부영 손을 내미는가 하면, 그 자리에서 기자가 말한 사과시한(07년 12월31일)을 슬그머니 넘기고는 감감무소식이다. 어떤 이는 기자를 옹호하는 글은 슬그머니 지우고 비방하는 글은 남겨두는 행위를 수년째 반복했다. 또 시간대별 악성 유언비어 증거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혹시 기자를 모함하는 게 주목적이 아니라 ‘악의적 반복적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관련 미국 실정법상 처벌수위’를 다름아닌 자기자신을 실험도구로 내놓고 연구하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니 기자는, 서두에 언급한 ‘독사의 풀밭을 걷는 이’에 비유하자면, 저 혼자 물리지 않도록 물려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바싹 정신을 차리고 행동을 조심했으되 다른 이들이 물리지 않도록 폭넓게 배려하는 정신이 부족했다고 자인할 수밖에.
그래서다. 법대로 대응이다. 자성적 반추에 의한 개선을 기대하기엔 지나치게 악의적이고 지나치게 반복적이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농도를 더해가고 있다. 예서 침묵은 더이상 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제2, 제3의 악행을 묵인 방조하는 것이다.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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