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화해했기에 망정이지(그래도 킹목사의 탄생일이 지나기 전에) 계속 으르렁댔으면 40년전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목사가 땅 속에서 땅을 치며 개탄했을 일이었다. 지난 며칠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주고받은 인종공방은 ‘미국 민권의 수호자’인 민주당의 대권주자들이 벌인 논쟁으로는, 뭐랄까, 너무 격에 맞지 않았다.
민권법 통과에 대한 흑인-백인 간 공과다툼으로까지 몰아갔으니 논점 자체부터가 창피해야할 수준이었다.
시작은 지난주 뉴햄프셔 예선 직전 힐러리의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였다. “킹목사의 꿈은 존슨대통령이 1964년 민권법을 통과시키면서 실현되기 시작했다…”라는 힐러리의 말이 일파만파로 번진 것이다. 그날 힐러리의 코멘트를 다 들어보면 ‘킹목사 폄하’로 오해받을만한 것은 아니다. 힐러리는 “케네디대통령이 하기를 원했지만(못했고), 그전의 대통령들은 시도조차 안했던” 의회통과 노력을 존슨은 했다면서 과제의 완성을 위해선 “대통령이 나서야한다”고 강조했다. 킹목사와 존슨 대통령의 역할보다는 케네디와 존슨, 두 대통령간의 비교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힐러리의 발언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학자들의 진단도 나왔다.
조지 메이슨대학의 흑인교수인 마이클 폰트로이는 “공공정책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브먼트는 의미가 없다. 무브먼트가 사회적 양심을 일으키는 시점에서 법제화가 이루어져야하는데 사명감있는 대통령은 변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지만 (부시처럼) 완고한 대통령은 무브먼트를 방해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킹목사 수석보좌관이었던 월터 폰트로이 목사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삼촌은 나에게 64년의 민권법과 65년의 투표권법 제정에서 존슨대통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수천번도 더 이야기 했었다”며 존슨의 업적 인정이 킹목사 유산 폄하는 절대 아니라고 강조했다.
남부백인들의 거센 반발에 고심하며 민권운동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세련된’ 정치가 케네디에 비해, 남부의 민주당 표밭도 포기한채 민권법 통과를 위해 팔을 걷어 부친 것은 텍사스 카우보이 존슨이었다. 당시 존슨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조셉 칼리파노는 최근 워싱턴포스트의 기고를 통해 “민권법 통과후 킹은 존슨에게 ‘당신은 제2의 노예해방을 이루어냈다’고 말했고 존슨은 ‘진정한 영웅은 미국의 흑인들’이라고 답했었다”라고 전하면서 “이것이 2008년 대통령후보들과 민권지도자들이 본받아야할 표본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 충고가 받아들이기까지는 며칠이 더 걸렸다. 힐러리의 발언은 흑인사회의 민감한 코드를 건드린 것이었다. 뭐, 결국 백인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흑인들의 민권운동은 이루지 못했다는 뜻인가, 킹목사의 역할을 순진한 꿈꾸기 정도로 깎아내려?…민권운동계의 분개한 반응이 잇달았다. 해명에 나선 힐러리는 “오바마측이 왜곡을 부추긴다”고 비난했고 오바마는 왜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느냐며 ‘힐러리의 무분별하고 불행한 발언’ 운운하며 반격에 나섰다. 이 와중에서 오바마 참모들은 힐러리의 인종관련 실언을 망라해 메모를 작성해 돌리고, 힐러리의 지지자인 TV방송인은 오바마의 마약복용 전력을 비아냥댔는가 하면 오바마의 캠페인을 ‘동화’로 깎아내렸다는 빌 클린턴의 코멘트까지 불거지면서 사태는 계속 난타전으로 치달았다.
양 후보가 아차, 정신을 차린 건 이전투구로 추락하기 직전이었다. 누구에게도 승산없는 게임임을 깨달은 것이다. 흑인표밭 사우스캐롤라이나 예선을 눈앞에 두고, 아무리 오해라지만 ‘킹목사 평가절하’에 휘말린다는 것이 얼마나 마이너스인지, 힐러리 진영이 모를 리 없다. ‘인종을 초월한 화합의 리더’를 지향해온 오바마가 말없이 지켜볼 백인 중도파를 의식하지 않을 리도 없다.
15일 라스베가스 공개토론에서 자리를 함께한 두 사람은 화해를 과시했다. 힐러리는 15일이 킹목사의 탄생일임을 상기시키며 “그의 꿈의 실현으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라고 치하했고 오바마는 “지지자들의 열정이 넘쳐 삼가야할 말들이 발설되었다”고 사과의 빛을 보였다.
‘우리는 민주당 한 가족’이라며 함박웃음을 보였지만 둘다 속이 편할 리는 없을 것이다. 또 ‘최초의 흑인대통령 탄생’이 현실로 다가오는데 인종논쟁이 없을 수도 없다. 당연히 생길 것이다. 21일 킹목사 기념일에 열릴 사우스캐롤라이나 공개토론을 비롯, ‘쓰나미 화요일’을 겨냥한 캘리포니아 등지에서도 다시 가열될 소지는 다분하다.
논쟁자체가 터부시 될 것은 없다. 문제는 논쟁의 내용과 자세다. 보다 건강하고 진지하고 성숙해야 한다. 이번 인종논쟁은 ‘맛뵈기’에 불과했지만 내용면에선 낙제에 가깝다. 조기진화 한 가지만 빼고는 치졸하고 미숙했다. 오바마의 인종뿐이 아니다. 힐러리의 성별도, 롬니의 종교도, 매케인의 나이도 다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한다.
이왕 할 것이라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 본선가기 전 경선에서 논쟁을 끝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당의 전략적 입장에서도 그렇겠지만 유권자 쪽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대통령을 뽑는 본선에선 인종이나 성별이 아닌, 진짜 이슈들 - 경제와 전쟁, 헬스케어와 이민, 교육 등 보다 중요한 민생문제에 대한 후보들의 대책을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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