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금방 묵은 것이 되어버린 얘기를 쓰자니 시의에 안 맞는 것 같지만 보기 따라서는 일년 앞을 전망하는 선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연말 송년모임에서 느낀 감회를 연장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중년을 넘은 사람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11월 중간쯤이면 눈에 익은 모교의 마크와 이름이 새겨진 송년모임의 초청장을 받고 문득 긴장하게 된다. 아마도 한해의 마감을 알리는 때 아닌 속보가 주는 놀람 같기도 하고, 서둘러 참석여부를 알려야 하는 부담감 같은 것이 겹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알면서도 애써 피하고 싶은 익숙지 않은 연말 행사 탓인지도 모른다. 날씨 탓만도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소 스산한 기분으로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명하게 맞닥뜨리는 모교의 로고 앞에서 일상의 현실은 정지한다.
한때 짧은 봄처럼 왔다 간 청운의 시절의 기억을 공유한 사실 외에는 지금은 생소하고 노숙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간소한 인사와 담소를 나누며 우리는 한동안 어색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교복 이야기가 나오고 선생님의 별명 같은 것이 나오며, 공동의 연상이 증폭되며 우리는 모르는 사이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동질성과 안도감에 모두 소년의 모습으로 재생된다. 먼 이국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온 비감까지 느닷없이 겹쳐오며 동반자 같은 마음으로 합쳐져 우리는 잠시 나이와 지위를 잊고 시간을 거슬러가는 무아의 경지로 표류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기분의 연쇄 화학작용들이 아마도 송년모임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기본 감정인 것 같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비정한 현실에서 비켜나 우리들 기억 속에 요람처럼 느껴지는 학동시절로 회귀하고 싶은 퇴행적 욕구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삶은 기억이다. 일년에 한번쯤은 푸르던 날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독특한 정감에 젖어 보자. 어쩌면 결국은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깝게 손을 흔드는 노스탈쟈인지도 모르겠다. 모국에서 번지는 동창회 열풍의 이면에도 영원한 젊음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알기로 각급 동창회의 실상은 이러한 면이 있다. 나와 상관없는 부질없는 감상으로 배척하며 일찌감치 돌아앉아 있는 동문들도 적지 않고, 매번 양가감정에 서성이며 가까운 친구들의 동태를 살펴가며 오락가락하게 되는 형편들이 또한 많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수십 년을 지나며 출석률이 과반에 미달된다. 나이와 형편을 뛰어 넘어 회원이 그득한 연회장은 보기에 아름답다. 그렇지 못한 현장에 서면 연민의 정으로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각급 동창회의 노령화 등 다소 침체되어가는 경향의 문제점이다. 또한 평준화 이전과 이후의 졸업생들의 모교에 대한 애착심이 현격히 다르다는 문제점 등이 동창회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에서 유난히 빠짐없이 나타나는 고교 동창회의 이름들은 배재, 용산, 중앙, 동성, 경복, 서울, 제물포, 보성, 사대부고, 전주고, 이화, 수도, 진명, 경기, 숙명, 금란 등등 듣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명문고의 이름들이다. 우리들은 아직도 형형색색의 깃발을 앞세우고 옛 서울거리를 누비던 기념행진의 흥분을 기억한다. 그때 그 이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누가 그 순수한 모교에 대한 애착심을 탓할 수 있는가. 동창회에 대한 냉소나 편견은 많이 버려도 좋을 것 같다.
이 글의 본론은 이제라도 가급적이면 만사제치고 송년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 삶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굳이 친절하게 부연하는 이유는 노년에 접어들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될 수 있으면 많은 일상의 정지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귀찮고 힘들고 돈이 들어도 여행, 미술관, 음악회 등 문화, 예술, 취미생활의 영역확대 등이 긴히 요구된다는 이야기이다.
두 번째 이유는 거의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느닷없이 이런 모임을 적극적으로 책임 맡아야 하는 운명이 갑자기 도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고를 덜어 주자는 이야기이다. 미리 미리 관심을 갖고 즐겁게 참여 하기를 바란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젊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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