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참모 지휘 대학 유학(4)
1년간의 교육이 끝난 것은 6월 초로 기억한다. 학교가 끝나기 직전 정일권 참모총장의 방문이 있었다. 그는 내게 귀국하면 작전국장의 직책을 주겠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이 실행된 것은 그로부터 거의 1년이 걸렸다. 나는 무사히 학교를 끝마치고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만도 다행으로 기다렸다. 우리는 귀국에 앞서 자동차로 미국을 횡단하자고 하는 자도 있었으나 자동차 운전을 안했던 나에게는 별 자신이 없었다. 결국에는 기차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다시 비행기 편으로 하와이를 거쳐 귀국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와 교체되어 유학케 되는 팀과 같은 호텔에 들게 되었으며 나는 유학 오는 박현수 장군으로부터 미화 100불을 얻어 샌프란시스코와 일본을 들렀을 때 긴요한 용돈으로 쓰게 되었다. 얼마나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유학길이었나 회상이 된다. 우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2, 3일간을 머물며 한국음식점을 찾은 기억이 난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한국 음식점은 당시만 해도 아직 유치한 단계에 있었고 불고기에 호배추로 담은 김치가 고작이었으나 그것도 우리에게는 별미였었다.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에 들렀더니 관계 직원이 전쟁을 피해 유학 온 학생에 대한 비난과 그로 인해 골칫거리라는 장황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우리를 의식한 과장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당시 젊은 자식을 가진 부모들의 심정을 찬성은 하지 못할망정 이해는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 사정이 미국에서 교육 받은 자들을 흡수 할만치 경제 사회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었다. 나는 차라리 그들이 교육 받은 후 미국에서 일터를 잡고 선진 사회 경험을 쌓고 있으면 언젠가는 우리나라가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느끼게 되면 그들이 자진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견해를 이야기해주었으며 내가 육군 본부에 있는 동안 그러한 의견의 주장자가 되었다.
나는 또 옛 친구인 김동영 군을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만나볼 기회를 가졌다. 김동영 군은 내가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된 직후 일본군에 속했던 한국 출신 장병의 한국 귀환을 위해 일본의 동북 지방 관구 사령부에 의해 우리들의 집결지로 지정한 동북 지방인 아이즈현 이나와시로고 집결지에서 만난 친구였다. 그는 경리 장교 출신이며 당시 영어에 능통해 우리 귀환 대기 중이던 900여 한인 출신 장병들의 후생을 위해 동분서주한 사람이다. 떳떳한 조국 귀환을 위해 우리를 새 피복으로 갈아입히며 각자에게 1개월 분의 건빵을 지급하는 교섭을 일본군과 미군 간에서 성사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군사 영어 학교를 거쳐 당시 통위부 보급 과장으로 재직하며 보급중대를 후방 부대라는 거창한 기관으로 확장하려는 채병덕 대령과는 업무상으로 의견이 맞지 아니해 불편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후일 중령으로 첫 미국 보병학교 고등 군사반에 유학했으나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새로 탄생된 국방부의 총 참모장이 된 채병덕 장군의 보복을 두려워 하와이 태생임을 이용해 유학이 끝난 후 귀국하는 대신 미국 군의 사병으로 입대하며 미국에 귀화함으로써 동료들과 장교들 간의 오해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잠시 한국전에 미군 정보요원으로 참여했었으나 과거의 경력이 한국군에 의해 문제되어 바로 미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내가 그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 때는 미국 군대를 마치고 난 후 많은 고생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나 나는 그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의 미국 시민권의 선택은 서울에서 의사로 있던 부인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뿐더러 낭군과 합치기 위한 미국행에도 큰 지장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에 있던 두 아들마저 잃게 되는 비운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후일 미국 연방 정부 내 VOA에서 근무하며 은퇴하였다. 내가 경제학 박사 과정을 위해 워싱턴에 위치한 가톨릭 대학에 왔을 때 그는 나에게 미국 생활을 위한 각종 도움을 주며 같은 교회에 다녔으나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일본 동경에서 하루를 묵었다. 일본의 무더위는 냉방 장치의 미비로 미국에 비해 더욱 어려웠다. 당시 동경은 내가 경험했던 1945년의 전후의 폐허에서는 복구된 듯 했고 그 당시와 같은 미군들에게 거리에서 구걸하는 광경은 보이지 아니했으나 아직은 빈곤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일본 학교를 다녔기에 보통 한국 사람에 비해서는 일본말에 대한 자신이 있었는데 1년간의 미국생활이 간단한 일상용어에서도 일본말보다 영어가 먼저 나오는 습성을 발견하며 어학의 능숙도보다는 일상의 습관이 더 무섭구나함을 깨닫게 하였다.
우리 일행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5년 6월의 비오는 날로 기억하며 비행장에는 친구와 친지들이 많이 마중 나왔다. 부모 형제들과 아내가 한국나이로 7세의 딸 미영이와 3세의 장남 용원이를 데리고 막 돌을 지난 둘째아들 용회를 안고 마중 나와 나를 환영해 주었다. 역시 고국과 가족은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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