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리더쉽
■ 전쟁터에서 발휘된 지휘도
나는 휴전 전에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의 백마산 고지 방문을 받은 바 있으며 그와 같이 백마산 정상에서 700능선 상의 중공군 진지를 바라본 기억이 있다. 나는 사단장으로 있으면서 훌륭한 지휘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미 9군단장 젠킨스 중장이다. 그는 밴플리트 장군과 같이 희랍에서 성공한 장성이었다. 그는 거의 2, 3일 마다 헬리콥터를 이용해 사단을 방문하였다. 그가 방문하면 한국 병사들이 호나 막사에서 나와 그를 보며 미소를 띠었다. 한번이 아니라 그가 방문하는 매번의 경험을 통해 이심전심으로 지휘도가 발휘되고 있구나 생각되었다. 내가 화살머리 고지 전쟁 때에 많은 포탄 소비로 문제 되었다는 소식에 대해 미안하게 되었다 했더니 빙그레 웃기만 해 내 마음이 가벼워져 무언중 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후일 대장이 되어 미 육군의 참모차장이 되었다.
또 하나의 예가 인접 미 7사단의 경우였다. 스미스 소장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그는 ‘폭음? 힐’을 탈환 당했다. 미군의 큰 희생이 두려워 재탈환을 포기시켰다고 들었다. 그가 사단장으로 재직 하고 있던 중 사단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한다. 사단장이 레미니처 장군에 의해 교체되었다. 사단 장병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단의 사기가 그리 향상될 수 없다 들었다. 사소한 일 같이만 지휘자의 자질이 부대의 사기를 좌우하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레미니처 장군은 그 후 대장이 되어 미 극동군 사령관 겸 UN군 사령관이 되었고 후일 주 유럽 사령관을 거쳐 미 합동참모본부장이 되었다.
■ 강두향 대대장
기왕 미국장성의 지휘도를 언급한 마당에 내가 감탄한 사단 장교에 대해 소개해 보겠다. 나의 부임 초기의 작전참모는 육군 대학 출신이었으며 육군 대학의 초창기라 육대 출신 장교를 참모로 갖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사단에 부임했을 때가 휴전을 앞두고 전선이 활발히 움직일 때였다. 사소한 적의 공격이 있을 때면 작전 참모는 주야를 가리지 아니하고 나 에게 직접 보고를 하였다. 나는 작전 참모의 열성에 불평은 못하였으나 나도 잠이 필요하며 사단장으로서 나의 직접 개입의 시기가 따로 있다 생각하였다.
하루는 일선 대대를 방문한 가운데 특별한 대대장을 만나게 되었다. 대대장은 일반적 상황보고 대신 사단장이 지난 번 방문한 후부터 달라진 사항만 보고한다는 말과 함께 나폴레옹 전기를 읽는 동안 포로 획득에 대한 경험에 감동되어 실험해 본 결과 2명의 중국 포로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전술도 상식적 행동을 체계화한 것으로 얻어진다. 그는 육군 대학 출신이 아닌 7기 출신 대대장 강두향 소령이었다. 나는 그 후 강 소령을 작전참모로 기용하였다. 그는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현지에 가 있었으며 시기를 보아 지금은 사단장 각하가 관심을 가질 때라며 전화를 주는 바람에 격전 중에도 나는 취침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화살머리 전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노도의 혈적’이라는 소책자로 경기도 일동으로 이동한 사단 창설 기념을 기해 엮어 주었다. ‘노도’란 제 2사단의 애칭을 말한다. 그는 장래가 촉망된 장교였으나 아깝게도 준장 때 세상을 하직 하였다.
■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이승만 박사
내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후보를 만나게 된 것은 1952년 12월 초로 알고 있으며 그 장소는 전선 미군 부대 사령부에서였다. 나는 그가 신경질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대통령 당선자로서 한국 휴전을 위한 공약 실천을 판단키 위한 방문이었다. 후일 이 박사는 한국의 통일 가능성을 보장 받지 못 하거나 북의 재침 방지의 보장 없는 휴전에는 반대한 것으로 안다.
휴전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납득시키지 못한 미국은 이 박사 에 의해 거제도에 위치한 반공포로 2만7,000명을 미국과 상의 없이 석방조치함으로써 한미 간의 긴장이 있었다. 급기야 로버츠슨 미 국무 차관보와 육군 참모총장인 콜린스 대장이 한국에 급파되었다. 나는 콜린스 대장을 위한 미 3사단 연병장에서의 열병식에도 참석하며 그 후 동 사단 사령부에서의 9군단 예하 사단장 브리핑에도 참석해 간단한 영어 전황 보고를 한 기억이 있다.
당시 미 3사단 대대장으로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그를 사단 정보참모로 보직을 전환시켰다는 말을 들었고 아이젠하워 중령과는 1954년 미 참모지휘 대학에서 동기생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나는 또 휴전 직전 이 대통령의 특사 신태영 원용덕 장군의 방문을 받고 한미 간 휴전 문제에 대한 대립으로 고문단의 경계를 의식했던 기억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한미 간의 타협이 이루어져 한국군의 근대화와 경제 원조 및 후일 한미 동맹의 체결로 휴전이 성립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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