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역사의 백미 신공황후
신공황후의 얘기를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옮기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으나 내용의 요점만은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공황후는 천년 이상 일본인의 정신을 지배해온 聖典(성전), 일본의 불가사의한 역사책 ‘일본서기’의 핵심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공황후의 조선정복의 무용담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어느 나라의 역사서가 그처럼 집요하게 특정 국가(조선)를 미워하고, 조롱하고, 모독하고, 빈정거리며 증오심으로 가득 메운 예가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조선에 대한 증오심의 뿌리가 이미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만 신라를, 백제를, 고구려를, 고려를, 조선을, 그리고 대한민국을 미워하는 천 년이 넘는 이 증오심 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풀어내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과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간 마사또모와 참모본부가 그토록 애를 썼던 일본서기 사실화 작업(이 부분은 일본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음)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720년 그보다 조금 앞선 700년대 초부터 지우고, 숨기고,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서 신라, 백제를 비롯한 삼한을 정벌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치정부의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비를 변조시키는 것이 시작이 아니라 700년대 초에 칠지도를 변조시키는 때로부터 사료변조는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최인호의 대하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에서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져가는 또 하나의 사건 ‘쥬고엥 고짓센’, ‘추엔 고주세엔’, ‘15원 50전을 말(발음)해봐’ 사건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 쥬고엥 고짓센’ 이라고 대답하는 조선인 6천명이 학살당한 1923년 관동(간토)대지진 사건 말입니다. 1923년 9월1일 일본의 간토지방 남부에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 사망자 9만, 부상자 10만, 실종 4만 명에 달했던 간토 대지진의 天災(천재)에서 조선인 6,000 명이 학살을 당한 이유는 “대 혼란 속에 빠진 민중이 사회운동가들과 결합할 것을 두려워했다”입니다. 이때의 피학살자 수 6,000명은 공식집계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한국인으로 특별히 구분되는 발음 하나로 죽임을 당한 사람 중엔 중국인 수백 명과 방언을 사용하는 지방출신 일본인과, 죽음 명부에 오른 오스키 시카에 같은 사회주의자나 노동조합 지도자들도 소수가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발생한지 80년이 지난 오늘도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국가로서 일본 내국인의 문제라며 외국의 비난과 질타를 피해 갔습니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잠재우는 구실로서 식민국가라는 것을 앞세운 것입니다.)
곁길에서 돌아와 일본서기에 나타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 무용담을 간추려 정리해 보겠습니다.
“…황후가 돌아와 바다에 들어가 말하되 ‘내 신의 가르침을 받고 皇祖(황조)의 위령에 의지하여 바다를 건너 서쪽나라(신라)를 치려한다. 이제 머리카락을 물에 담글 것이니 성공하겠거든 나의 머리카락이여 두 갈래로 나누어질 지어다’하였더니 머리가 두 갈래로 갈라지더라… 그해 겨울 10월10일 和珥津(화이진)을 출발하였다. 이 때 風神(풍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해신은 파도를 일으키고 바다의 큰 고기들이 모두 떠올라 군선을 밀어주고 순풍이 알맞게 부는 등 삿대를 사용치 않고 모두 신라에 도착했다. 신라 국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사람들을 불러놓고 ‘신라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국중에까지 올라온 일은 없다. 이제 천운이 다하여 이 나라가 바다가 되었는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船師(선사)가 바다에 뜨고 깃발이 햇빛을 받아 나부끼고 고성이 일어나는 등 천지가 진동하는지라 신라왕이 멀리서 보고 크게 두려워 백기를 들고 도적을 가지고 王船(왕선)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가로되 ‘금후 천지가 다할 때 까지 귀국의 말먹이가 되어 선타(키)가 마를 나위 없이 춘추로 말과 말발굽을 헌납할 것이요, 또한 바다가 멀고 가까움 없이 언제나 매년 남녀의 用度品(용도품)을 공납하겠습니다. 또한 거듭 맹세하여 가로되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 한, 아리나례하(낙동강, 또는 압록강)가 역으로 흐르고 강바닥의 돌이 하늘에 올라 별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춘추의 조공과 말밀과 말발굽의 조공을 게을리 하지 아니할 것을 천지신명과 함께 맹세하나이다’하였다… 그리하여 황후는 국중에 들어가 보물의 창고를 봉하고 서류와 문서를 압수하고 말먹이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황후가 가졌던 창을 후일의 증거로 신라왕의 문전에 꽂아두었다. 그러므로 아직 그 창이 아직도 신라왕의 문전에 꽂혀있다”
“역사의 사실 앞에서 위의 신화가 조작된 허구라는 것을 모르는 학자는 없다. 그럼에도 이 신공황후의 무용담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려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조선이 한때 일본의 신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요꼬이가 신묘년을 신공황후에 연결하려 했던 것은 이러한 치밀한 계산 때문이었으며 아울러 신공황후와 연결할 수만 있다면 신공의 역사적 사실이 성립되고 신라의 정벌도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잃어버린 왕국’에서는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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