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성경 속의 지성소 등을 뜻하는 sanctuary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사회적 용어로 널리 쓰여 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레이건 시절 내전이 심했던 엘살바도르 등 중남미국가에서 밀려든 난민들을 보호하는 운동을 sanctuary movement라고 부르면서 부터였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불법 입국하는 이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하고, 이민국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시정부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불법입국자들을 위한 도피처 정책을 처음 시행한 시는 미국 리버럴의 상징인 버클리였고 뉴욕과 LA 등 대도시들도 차례로 뒤따랐다.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들도, 교통법 위반을 단속하는 경찰들도 이들에게 체류신분을 묻지 않았다. 당시 50만에 달했던 이들은 ‘법의 힘이 미치지 않는 성역’, 커뮤니티가 마련해준 도피처에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97년 연방의회가 시공무원의 이민국신고 금지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도피처 도시(sanctuary city)는 크게 줄지 않았다. 현재도 최소한 26개 주내 73개 도시에 달한다. 대부분 ‘도피처 도시’라고 공표는 안하지만 응급진료등 복지혜택과 공립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신분을 이유로는 체포하지 않는 등 불법체류자들에겐 그래도 불안한 일상을 기댈 수 있는 ‘성역’이 되어주고 있다.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이 따뜻하고 좋은 말 ‘sanctuary’가 요즘 미대선 공화당 경선에서 치명적 전염병균이라도 되는 듯 후보들이 질겁하는 기피 단어가 되고 있다.
지난 주 CNN이 주관한 공화당 ‘유튜브’ 합동토론회의 이민관련 논쟁은 글자그대로 목불인견의 이전투구였다. 공방전의 내용조차 대선후보들의 토론이라 부르기엔 민망한 수준이었다.
미트 롬니가 루디 줄리아니에게 뉴욕시장 시절 불체자들을 옹호했다면서 첫 공격을 가했다. 연방법을 위반하며 불체자들에게 복지와 교육 서비스를 제공한 당시의 뉴욕은 ‘도피처 도시’였다고 비난했다.
“뉴욕은 도피처 도시가 아니었오” 줄리아니가 대답하자 사회자가 롬니에게 되묻는다. “뉴욕이 도피처 도시였습니까?” 롬니가 대답한다. “물론이지요, 자칭 그렇게 불렀다니까요…” 당하기만 할 줄리아니가 아니다. “그러는 당신 집에선 불법체류자가 일하잖아요?” 롬니의 자택 정원관리를 하는 가드닝회사에 불체자 종업원이 있다는 소문을 들먹인 것이다.
‘도피처 도시’의 시장과 ‘도피처 저택’의 주인은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계속했다. “이보시오, 시장님, 서비스를 맡긴 회사의 종업원 신분확인도 내 책임이란 말입니까? 일하는 사람이 웃기는 액센트를 쓰면 신분서류를 보여달라고 합니까, 그건 미국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불법체류자이니 아파 죽든, 아이들 학교를 못 보내든 외면하라는 것은 ‘미국적’일까)
뉴욕이 사실상 ‘도피처 도시’에 속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아니라고 극구 변명하는 줄리아니의 해명도 궁색하다 : ‘불체자녀의 공립학교 입학을 허용하지 않으면 7만명의 아이들이 거리에 방치되었을 것이다. 뉴욕의 범죄율 상승을 막기 위해서였다…’
줄리아니가 불법이든 합법이든 이민자들의 공헌이 뉴욕을 비롯한 미국사회에 번영을 가져왔다고 찬사를 보낸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불체자를 신고하라는 연방법이 뉴욕시에 혼란을 가져온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도 줄리아니 시장이었다. 말바꾸기로 치자면 이날 토론회에서 반이민의 기수로 나선듯했던 롬니나 프레드 톰슨도 다르지 않다. 두 후보 모두 인터뷰 등을 통해 1,200만 불체자에게 합법신분의 길을 여는 포괄적 이민개혁안에 지지를 표한 기록이 생생하다.
제각기 경력과 지성을 갖춘 후보들이다. 자신의 말 바꾸기에 대한 자괴심이나 보다 현실적인, 보다 인도적인 이민관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진 공화당 표밭의 뜨거운 반이민정서에 영합한 때문일 것이다. 이날 토론장의 분위기도 그랬다. 아칸소주지사 시절 불법체류 학생들에게 장학금신청 자격허용제안을 한 것에 대해 롬니에게 공격당하자 “미국은 부모의 잘못에 대해 아이들을 처벌하는 나라가 아니다”라고 응수한 마이크 허커비 후보나 “불법이민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고 말한 존 매케인 후보의 이성적 발언이 과격한 리버럴로 느껴질 정도였다.
불법체류자에 대한 복지혜택 전면중단은 물론 대통령이 되면 6개월내 전국경에 장벽설치를 완공하겠다는 장담에서부터 합법이민도 중단해야한다는 선동적 극단론까지 난무한 공화후보들의 이민정책은 한마디로 ‘비정한 후보’ 선발대회를 방불케 했다. 그동안 공화당 지도부가 강조해온, 사회적 약자들도 따뜻하게 끌어안겠다는 ‘온정적 보수주의’는 그림자도 찾기 힘들었다.
극우보수파의 반이민 캠페인은 이처럼 여론 선동에 ‘성공’ 을 거두고 있는데 도대체 진보파 친이민 진영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레 겨울잠에 들어간 것은 아닌지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불안을 떨치기 힘들다.
아이러니컬한 이야기 한토막 : 롬니의 아버지 조지 롬니는 멕시코에서 출생했다. 1880년대 연방정부가 몰몬교의 중혼제를 단속하자 몰몬교도인 롬니의 조부모들은 ‘도피처’를 찾아 멕시코로 도주했다. 그곳 주민들은 일부다처인 몰몬교들을 쫓아내려했으나 멕시코정부의 보호정책으로 평화롭게 정착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시 현지주민들이 반이민 히스테리를 일으켜 이들을 추방했더라면, 그래서 미국으로 송환되어 투옥되었더라면 조지 롬니는 태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아들 미트 롬니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을 위한 ‘도피처 때리기’에 앞장서는 일도 없었을까…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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