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661까지 豊(풍)이 백제왕자의 신분으로 대화왜에 머문 것은 당시 백제왕의 지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멸망이 31왕 678년의 의자왕 때가 아닌 663년 白江口(백강구) 전쟁 때의 豊(풍:餘豊璋:扶餘豊)의 시대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삼국의 史書(사서)인 한국 사서(三國史記), 중국 사서(舊唐書), 일본 사서(日本書記)가 공히 대화왜로 파견되어 있던 백제의 왕자 豊(풍)이 의자왕 이 왕도 熊津(웅진)에서 라. 당 연합군에 항복한 후 귀국 하여 왕위에 즉위하고 제명천황이 준비한 지원군과 무기로 항전하였으나 패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제명천황이 660년 12월 백제 무왕의 조카인 福信(복신)의 지시에 따라 백제 지원군과 무기를 준비 하였으나 661년 제명천황이 세상을 뜨자 다음 왕인 天智天皇(천지천황)이 제명천황이 준비한 무기와 구원병을 복신에게 전달하였고 복신은 상전이며 백제부흥군의 왕위에 즉위한 풍왕에게 이를 전달하였다”라고도 기록 되어 있습니다.
또 663년 백강구 전쟁에서 패한 백제의 장군들은 백제에서 야마토에 이르는 해상루트 선상의 요지, 예를 들면 對馬島(대마도)의 金田(금전), 구주의 大野(대야), 椽(연), 長門(장문), 讚吉(찬길)의 屋島(옥도)<현재의 香川縣(향천현) 高松市(고송시)의 屋島> 및 大和의 高安(고안 :奈良縣(내량현)과 大阪府(대판부) 경계의 高安山) 등에 백제의 산성을 구축하고, 더 있을지도 모르는 신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고 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백제에서 건너온 백제 지배층은 야마토로 이주해온 백제인들의 생활대책과 식량 비축 등에 힘을 기울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제 일본서기에 나타난 唐(당)의 일본진출, 일본서기에 나타난 成德太子(성덕태자), 大和倭의 군대 기사 등 살펴볼 내용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나 잠시 뒤로 미루고 고구려의 담덕 광개토대왕의 얘기를 좀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구려 제19대 호태왕 광개토왕은 18세(17세로 보는 경우도 있음)에 즉위하여 39세 사망할 때까지 약 22년 동안 백제로부터 빼앗은 성이 무려 대륙의 17개 성(700개 촌락)과 반도 쪽에서 빼앗은 58개 성(700촌락)이 됩니다. 이를 다 소개할 수는 없겠으나 그 중 중요한 지역의 중요한 사건을 다뤄보기로 합니다.
먼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봅니다.
-광개토왕의 휘는 談德(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웅위하고 남에게 구속되지 않는 뜻이 있었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9년에 왕이 돌아가자 즉위하였다.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쳐 10城(성)을 빼앗고, 9월에 북으로 契丹(거란)을 쳐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잡혀간 고구려 백성 1만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백제의 關彌城(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의 사면이 심히 험악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왕은 4만의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하기를 20일 만에 함락 시켰다. …4년 8월에 왕은 백제와 더불어 浿水(패수) 위에서 싸워 대패시키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桓檀古記(한단고기)에서는 광개토경호태황은 隆功聖德(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사해 안에서 모두 烈帝(열제: 수나라의 사서에 고국원왕을 소열제라 기록했고 대무신왕을 대무신열제라 하였음)라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 했다… 참성단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 지냈는데 역시 天樂(천악)을 사용하였다.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倭國(왜국) 사람들을 격파하였다. 倭人(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倭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 침범하게 하였다….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바쳤고 거란, 平凉(평랑)도 모두 평정하였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 때가 그 극성기이다.
위 삼신 제사에 관한 설명과 해동이라는 표현의 문제점은 차후 설명될 것입니다.
이어서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실록(박영규 지음)으로 가봅니다.
-광개토왕은 즉위와 동시에 과감한 영토확장정책을 감행한다. 이에 따라 고구려 영토는 확장되고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 의 위상도 제고된다… 백제의 침입에 신라는 위급사항을 고구려에 알리며 도움을 청했고 고구려는 신라와의 화친조약(신라 내물왕의 조카 인 실성(후에 실성왕)을 인질로 보내 화친한 바 있음)에 따라 392년 7월 4만의 군사를 동원 백제의 대륙 영토인 요서군과 진평군 일대를 공격하였다.
고구려가 백제의 대륙기지를 먼저 공략한 것은 도성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자칫 한반도의 백제를 공격하다가 하북과 산동의 요서군과 진평군에 주둔하던 백제 3만의 정례병력에게 도성을 공략 당하면 제16대 고국원왕 사망 때와 같은 곤경에 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북의 요서군으로 몰려든 고구려군 4만의 병력은 10개성을 함락 시킨 후 주둔군을 남겨두고 다시 북진 하였다. 당시 북쪽에는 거란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 변방을 노략질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고구려 백성 1만여 명이 거란에 붙잡혀갔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지레 겁먹고 달아나고 남은 500명의 거란인과 끌려갔던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환국 시키고 다시 남진하여 10월에 백제의 요새 중의 요새인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 시켰다. 관미성은 주위가 바다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이며 요서에 머무르던 백제 최후의 보루였다. 그 관미성이 무너지자 백제는 요서군을 상실하고 하수(황하) 남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백제와 더불어 혈전을 벌였다는 浿水(패수)와 관미성을 상실한 백제가 河水(하수:황하) 남쪽으로 밀려났다는 그 浿水 (패수)와 河水(하수)의 위치에 관한 설명은 뒤로 미룹니다. 패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경계였다, 연나라가 한나라에 망한 뒤는 패수가 한과 조선의 경계였다 라고 하는 그 패수 말입니다.
www.waks.info에 들어가면 ‘협의회 자료실’에 본 보 연재내용이 1호부터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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