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은 ‘독한’ 민족이다.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 각국을 방황하면서도 끝내 이스라엘을 세우고 적대적인 수억의 회교도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꿋꿋이 그 나라를 지켜내고 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끝없는 박해 속에서도 과학, 철학, 문학, 예술, 금융 등 각 분야에서 어느 민족보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재를 배출했다.
이런 ‘독함’의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기억하려는 의지가 아닐까. 유대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어려운 것의 하나가 기억하는 일이라고 본다. 파라오와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비롯 곧 다가오는 독립 기념일인 하누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대인의 명절은 유대인 역사의 재현이다.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의식을 통해 자신과 2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선택된 민족이며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유대인의 이런 기억에 대한 집착은 거란, 여진, 돌궐 등 다른 민족들과 대조를 이룬다. 한 때 동북아시아를 휩쓸던 이들은 지금 흔적조차 찾기 어렵고 이들이 어떻게 생겨나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기억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유대인보다는 거란과 여진족을 닮아 있다. 하루하루 바쁜 삶을 살면서 수천 년 전 역사는 고사하고 몇 년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잘 악용하는 비즈니스의 하나가 언론이다. 7~8년 전 미국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때 대다수 언론은 ‘어째서 주가는 떨어질 수 없고 영원히 오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기사로 지면을 메웠다. 그 후 하이텍 버블이 터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투자가들은 천문학적 손실을 입었음에도 이 때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구한 언론이나 언론인은 거의 없었다.
불과 1년 전 미 주택 경기가 뜨거웠을 때 이번에는 어째서 미국 집값은 오를 수밖에 없으며 버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 말을 듣고 집을 샀던 수많은 사람들이 페이먼트를 못해 차압당하고 그 여파로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는데도 자신의 잘못된 예측이나 기사에 대해 사과하는 글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그 실체를 냉정히 분석하기보다 호들갑을 떠는 게 대다수 언론의 생태다. 실체보다 과장하고 난리를 쳐야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그래야 신문이 팔리기 때문이다. 일단 그 현상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입을 씻게 마련이다. 세월이 지나면 새로운 뉴스가 나오고 그 와중에 독자들은 옛날 일은 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김경준 케이스도 똑같다. 한국 언론들은 하나 같이 이번 사건이 ‘대선의 핵’이니 ‘뇌관’이니 하며 김씨의 말 한마디에 여야 후보의 당락이 좌우될 것 같이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후보가 결정적 타격을 입으려면 김씨가 신빙성 있는 증거를 제시하고 이명박 후보가 이를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김씨에게 그런 증거가 있느냐도 불확실하지만 검찰이 이를 토대로 이 후보에게 불리한 발표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냐는 의문이다. 이 후보가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 너무도 분명하며 법원 판결이 나기 전 검찰의 주장이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이 사건으로 이 후보가 결정적 타격을 입더라도 그 수혜자는 이회창 후보지 여당 후보가 아니다. 이명박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이회창을 놔두고 정동영을 지지할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여권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이 사건으로 이명박 후보가 ‘적당히’ 타격을 입어 야권 표가 반반으로 갈리고 정 후보가 범여권을 통합해 3:3:4로 표를 얻는 것이다. 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성은 거의 없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언론은 대선 전까지 김경준을 대서특필하다 나중에 이 사건이 대세에 지장이 없었던 것으로 판명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언론인들도 가끔은 스스로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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