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재발견-심하게 가벼운 상상력에 대하여(상)
<커피 프린스 1호점>과 한국 미디어 속의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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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튀세, 확장된 사유에 대하여 말하다
알튀세는 말했다. 너희의 사유를 극단으로 밀어부치라.고.
단, 알튀세의 이러한 언급에는, ‘행위’가 아니라 ‘사유’에 한해서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럼에도 ‘극단’이라는 단어의 ‘극단적’ 뉘앙스로 인해,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자칫 좌우 양극으로 심하게 경도되었거나, 비이성적 사고로 변질될 우려가 있으므로, 또한 무척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보라. 알튀세가 말하는 바, ‘극단’으로 밀어 부치는 사고란, ‘더욱 폭 넓은, 혹은 장을 뛰어 넘은, 그리하여 경계와 상식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더욱 확장된 사고의 광대한 폭을 의미하는 것일 뿐, 단어적 의미 그대로의 ‘극단’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의 소위 ‘극단적 사유 방식’ 운운은 헤겔 식의 ‘방법론적 회의’라는 용어와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 볼 수 있으리라. 과연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극단적 사유 방식’ 즉, ‘더욱 확장된 사유’에 대해 얼마나 포용성을 가지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얼마전 한국 대중 문화 강의 준비를 위해 <커피 프린스 1호점>이라는 드라마를 선택,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 섹슈얼리티 및 호모 섹슈얼리티 /바이섹슈얼리티 /트랜스 젠더라는 그날의 수업 주제를 풀어간 적이 있었다. 한 주간 수업을 준비해 온 학생들은 <커피 프린스 1호점>과 일련의 동성애 코드 비쥬얼을 대상으로 하여 한 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날 토론 수업의 열기는 주제가 주제여서 그랬던지, 선생이 개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 올랐고, 토론의 종반에 이르자, 그들은 하나의 결론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
결론1, 한국의 미디어는 호모 섹슈얼리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가짜 동성애 코드이다.
결론2, 한국의 미디어는 호모 섹슈얼리티를 형제애나 자매애 등으로 위장한다.
결론 3, 한국의 미디어는 호모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왜곡, 잘못된 인식을 사회적으로 전파한다.
2. <커피 프린스 1호점>과 <올훼스의 창>
중학교 때였던가. 그 시절 ‘우리’는 메울 수 없는 현실과 꿈 사이의 간극을 유령처럼 떠돌며, <올훼스의 창>이니 <베르사이유의 장미>니 하는 이케다 리요코 류의 만화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남녀 공학이라고는 눈씻고 찾아 볼래랴 찾아 볼 수 없었던 그 암담했던 시절. 우리들의 사춘기란, 싸인과 코싸인이 헷갈려 하나의 수학 문제 만을 수업 시간 내내 풀고 또 풀어대던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 선생님들이나, 이미 취학 아동들의 아버지가 되어 삶에도 적당히 지치고, 가르치는 일에도 적당히 지쳐버린 중년의 남선생님이 전부인 감옥 아닌 감옥에서 오뉴월 시래기단처럼 누렇게 쇠어 가는 그것이었다.
그나마 심심산골 여학교로 교생 실습을 오는 초짜 교생들또한 다리통이 무척 튼튼해 뵈던 여선생들 뿐이어서, 우리들의 감성지수라는 게 그야말로 바닥을 쳐대던 그 시절, 그나마 우리의 감수성에 한 줄기 단비를 내려주던 것이 있었으니, 이름하야 <올훼스의 창>과 <베르사이유의 장미>였던 것.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 시절 우리가 얼마나 오스칼과 유리우스에게 열광했던가를.
알다시피, 이 두 만화는 남장을 한 여자, 게다가 그들의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것이어서 자신의 여성적 성징을 숨기기란 시쳇말로 ‘석달 장마 중 별따기’ 임에도 불구하고, 남학교와 군대라는 남성사회 속에서 종횡무진, 사랑에 죽고 돈에 울고 한다는, 뭐 그런 약간 시시껄렁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말이다, 고래적 사춘기 아해들의 시시껄렁한 러브 스토리, 판타지물을 21세기 선진 한국의 미디어 영상물에서 다시 보는 감회를 어찌 표현해야 할까.
‘유행은 돌고 돈다’고 패션을 정의한 크리스챤 디올의 혜안에 경의를 표해야 할지, 인간의 사고라는게 뭐 거기서 거기가 이니겠는가고 약간은 시니컬한 해져야 할지, 어째 기분이 아리송하고 걸쩍지근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두 만화 속 주인공이자 남장 여자인 오스칼과 유리우스란 당대 여학생들에겐 하나의 불가능한 꿈이자, 인생의 여로 위를 때로는 빠르게 질주하거나, 고장난 자동차처럼 가끔씩 쉬어가기 위한 하나의 가짜 꿈이거나 판타지였다. 유리우스파니 오스칼파니 하며 편을 나누어 싸움질을 일삼던 우리들에게, 그것은 동성애 코드 혹은, 가짜 동성애 코드 그 어느 쪽의 의미도 끼어들 틈이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한 없이 불투명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코 앞에 버티고 선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단절로 인한 외로움을 극복하는, 일종의 미숙하지만 무척 자본주의적인 해법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오늘날의 이 모호한 성적 정체성, 혹은 미화되고 왜곡된 가짜 동성애의 이미지를 값싸게 팔고 있는 한국의 드라마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될 것같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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