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다녀 온지 한달이 되어 간다. 아직도 나의 생체기능은 오전이면 한 밤중이다. 잠꾸러기가 된 요즈음 같아서는 고정된 직장을 갖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일찍이 마음을 비우고 검소하게 살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시작한 덕분이다. 다리를 뻗을 수 있는 평안한 내 집과 남에게 빚을 안지고 살면 된다며. 그런데 이렇게 시차적응이 더디어지니 뒤로 쌓인 일거리들은 산더미인데 마음이 좀 심란해진다.
며칠 전 한 친구에게 지난번의 고마움을 말하려고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시댁에 일이 있어 일주일 다녀왔다던 친구는 온 종일 몸살로 누워있었다고 했다. 퇴근한 남편이 사온 양념통닭과 냉면으로 저녁을 먹었다는 말에 나의 입가엔 군침이 돌았다. 삼년이 넘도록 수필집 한권을 발간하느라고 엄청 피로가 쌓인 탓인지 행사를 마치고 돌아 온 나는 입맛조차 잃고 몸살로 누워있었기 에다. 고국에 산다면 친구처럼 맛있는 것 사서 먹고 일어나 지금처럼 빌빌거리지는 않을 텐데. 내 집 근처는 온통 미국음식점 뿐이다. 몸이 아플 때면 한국적인 음식이 더욱 그립기에 고국에 사는 친구들이 부러워진다. 고국을 향하여 이삿짐 보따리를 마음으로 꾸렸다 풀었다 되풀이를 하며 갈등도 일으켰었다.
지난달을 되돌아보니 내 평생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하고 왔다.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좋아 대학생 시절부터 학교신문에 첫 글을 올렸었다. 그 후, 문예지를 구입해 읽고 공부하면서 거의 쉬지 않고 가끔씩 글을 써 왔었다. 성실한 마음 하나로. 그리고 인연이 다가온 어느 날, 한국의 문단에 수필가로 신고를 했다. 과거의 직업이던 교육자 선생님이 아니라, 언어 예술가로 불려지는 ‘수필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매력을 느끼면서.
그러다가 가족과 주위사람들의 격려로 글을 모아 수필집을 낸 것이다. 책의 내용 중에는 30년 전의 물상시간 추억들과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과의 특별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았다. 책을 만들었기에 제자들에게 선물하겠다고 했더니 두어 제자가 축하한다며 작은 출판기념회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대부분 자식을 키우며 한창 자신들 앞가림하고 살아가야하는 분주한 나이이기에 혹시나 폐가 될까 나는 은근히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결코 손해는 안 날 터이니 선생님은 아무 걱정도 말란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몇몇의 준비위원들이 행사를 구상했다. 장소를 예약하도록 한 제자가 비용을 내놓더니 절반의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멋지게도 인천에 사는 여 제자가 커다란 밴에 악기를 싣고 먼 길을 달려 와 출판기념회를 빛내주었다. 음악적 재능이 많은 여제자는 드럼을 친다. 취미로 베이스 기타를 치는 남편과 음대에 다니는 두 아들로 구성한 가족 밴드였다. 여러 제자들의 멋들어진 글 낭송, 또 제자의 딸과 친구들이 불러준 창 가락들이 얼씨구 절씨구 분위기를 흔들었다. 다른 제자의 딸이 가곡을, 나의 딸은 영어 팝송으로 축가를 불렀다.
막판에는 다같이 일어나 춤추고 노래를 부르며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나의 은사님들이 돌아 가셨지만, 바른 국어를 가르쳤던 팔순의 이영의 은사님과 격려를 늘 보내주던 담임 조병한 은사님의 참석이 영광이었다. 학창시절 우리들 도서반 과외클럽을 지도했던 정선생님은 아들을 통해 축하금을 보내왔다. 그렇게 3대의 스승과 제자들이 모였다. 또한 여고 교사시절 나와 함께 근무했던 김현중 교장선생님(당시 교감)이 참석하여 감사했다. 34년 전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광주광역시 지역은 물론 타 지역에서도 바쁜 일들을 제치고 한마음으로 모여들었다.
여고를 졸업한 후, 대부분 만나보지 못했던 나의 친구들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 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참석했던 문인의 축사처럼 ‘레몬향기처럼’ 이라는 한 권의 책이 그토록 아름다운 만남의 다리를 놓아주었다. 여러분들의 행복한 얼굴의 물결 속에서 저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백발의 환한 친구의 미소가 떠올라 문득 나의 입가에로 번져온다. 나와 초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며 남달리 역사과목을 좋아하던 친구였다.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외롭게 부모를 모시는 고달픈 삶이건만 그녀의 평화로운 얼굴은 여전했다. 차분함과 그녀만이 지니는 내면의 너그러움 때문일까?
행사장의 식탁위에 놓인 책을 읽느라고 책장을 분주히 넘기며 반짝거리던 사랑의 눈동자들을 기억하면 나는 오래오래 행복할 것 같다. 살아가는 보람이 이런 것들인가. 때때론 생각지도 않던 기적을 맛보면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온 시차적응과 함께 나는 아름답고 꿈같은 긴 여정에서 이제 깨어나야 하는데.
그렇지만 어찌 밤과 낮이 바뀌어 지는 것만이 우리의 시차적응일까요!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위와 며느리에게도 자기 쪽에서만 기준을 두고 서운해 하니 적응이 안 되고, 한 핏줄을 나눈 형제끼리도 의견이 맞지 않아 적응이 안 되어 고민이고, 한 지붕 아래 평생을 살아오는 부부간에도 의견이 달라 답답할 때가 많고, 친구 간에도 칭찬보다는 시기와 질투로 범벅이 되니 아름다운 적응을 못하며 살고, 이웃끼리도 개성이 다르니 적응하기가 때론 암담하고, 우리 인간끼리도 시차적응만 잘 이루어진다면 만사가 하수구 뚫리듯이 순조로울 터인데도 말이다. 평화롭고 단순한 생을 꿈꾸며 날마다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늘 이렇게 복잡한 것을. 아, 그래도 코드를 서로 맞추며 적응 하려는 착한 사람들의 맑은 얼굴을 그려보면서 또 새 날을 맞으련다.
최미자
약력: 한국 광주와 미국 샌디에고에서 교사 역임. 월간 ‘피플 오브 샌디에고’ 주필 역임. ‘현대문예’와 ‘수필시대’ 수필 신인상. 수필집‘레몬향기처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