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런스데이(11일) 맞이 특별기획
코리아는 나를 잊어도 나는 코리아를 못잊어,
생사를 넘나든 그곳에서의 단 1분도 후회하지 않는다”
‘초신퓨(The Chosin Few), 한국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Korea Nov 1950 Dec)’, 그의 자동차 번호판에 새겨진 단어다.
미 동부해안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나고 자란 코빗 레이(Corbit A. Ray, 77세)씨가 미해병대에 입대한 것은 그의 나이 17살, 그로부터 3년뒤 그는 미해병대 제1사단이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진호(Chosin) 전투’에 참가한다.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강을 막아서 만든 인공호수인 장진호에 맥아더 장군은 미해병대 1사단의 진격을 명하고 전쟁을 크리스마스전에 끝내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당시 공식적으로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 이미 중국의 인민지원군 9병단이 몰래 장진호 일대에 들어와 있었고 12만명에 달하는 9병단은 미해병대 1사단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후 크게 포위해 공격했다. 미해병대 1사단은 인해전술로 압박하는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면서도 적 10개 사단중 7개 사단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당시 전사자는 미
해병 2,500여명, 중공군은 4만여명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인 ‘초신퓨(Chosin Few)’라는 단체가 생겼으며 물론 코빗 레이씨도 이중 한명이다. ‘장진’은 일본어로 읽으면 ‘초신’이 되는데 한국전 당시 한국에는 변변한 지도가 없어 일제 때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에서 일어를 영어로 그대로 바꿔 부르던 것이 지금의 ‘초신’이 된 것이다. ‘퓨(Few)’는 극소수의 생존자를 뜻한다.
1950년 9월 18일, 캘리포니아 샌디에고항에서 ‘도그중대(Dog company)’ 동료 280명과 함께 배에 몸을 실은 코빗 레이씨는 그로부터 6일뒤 인천에 상륙했다. 당시는 9월 15일 있었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전세를 반전시켜 나가는 시기였다. 도그중대는 인천에 상륙한 뒤 서울을 지나 북으로 북으로 진격해 올라갔다. 레이씨는 당시를 “포병들이 포화를 퍼부으면 뒤따르는 우리들이 북으로 진격해 올라갔다”고 전했다.
장진호까지 진격해 들어간 도그중대는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 9병단의 포위 공격에 큰 손실을 입는다. 레이씨가 속한 도그중대 280명중 전투가 끝난 뒤 병원에 후송되거나 전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은 병사들의 숫자가 단지 10-15명뿐이었다고 레이씨는 전했다.
레이씨도 당시 큰 부상을 입었다. 그 부상으로 그는 오른팔을 잃었다. 그는 부상 당시를 이렇게 전했다.
“포탄으로 발생한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다 하늘을 봤는데 왼쪽 머리위에서 폭탄이 터져 눈을 가린 오른손에 파편이 뚫고 들어왔다”면서 “동맥이 파열돼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그가 부상당해 함흥에 있는 한 병원으로 후송된 것은 11월 3일, 중공군이 정식으로 전쟁에 개입하기 이틀전이다. 병원선에 실려 일본으로 이송된 그는 그곳에서 수술을 받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한달 13일간’의 한국전 참전은 그렇게 끝났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옥같았던 전장을 경험해야 했고 자신의 오른팔을 잃게 한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에서의 단 1분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미 정부에서는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해 전공으로 받을 수 있는 훈장중 세번째로 높은 ‘실버스타 메달(Silver Star Medal)’을 수여했다.
코빗 레이씨는 같은 중대내에서 부상없이 장진호 전투에 참가하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단 1명뿐이었다고 전했다. ‘행운의 사나이’는 현재 교사직으로부터 은퇴하고 뉴멕시코에 거주하고 있다고 레이씨는 전했다.
한국전 이후 한국에는 안가봤냐는 기자의 질문에 레이씨는 “학생들이 두려워서 갈 수 없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었던 시기, 미국에 사는 시민으로서는 두려웠을 법도 하다. 레이씨는 “다른 전우들은 2-3번씩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에 다녀왔다”며 “지금이라도 지원하면 한국정부에서 무상으로 방문을 지원해주지만 아내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전에서 돌아온 후 1970년까지 19년간 집에서 8마일 떨어져 있는 오클랜드의 한 병원에서 다른 해병대 전우들에게 인공팔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서 의수, 의족 등의 물품구입 담당자로 일해왔다. 현재는 은퇴한 상태다.
그는 현재까지도 한국과 인연이 많다. 그의 주치의 두 명이 모두 한인이다. 아내의 치과 주치의도 한인이라고 한다. 그들 모두 코빗 레이씨에게 감사한다고 한다.
지금의 한국이 있기까지 코빗 레이씨와 같은 사람들의 희생이 밑바탕에 있었음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박승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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