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는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있다. 코스모스 주변에는 갖가지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내 눈길을 멈추게 하는 꽃은 언제나 코스모스이다. 이따금 큰딸이 퇴근 후 나를 데리러 가게로 오는데, 동네 입구로 들어서면 코스모스가 가득 핀 집 앞을 지나게 된다. 이곳에는 코스모스가 흔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 코스모스가 많은 것 같다.
“어머, 저 코스모스 좀 봐.” 그곳을 지날 때면 눈길을 떼지 않고 꽃구경에 여념이 없는 나를 눈여겨보고 있던 딸이 코스모스 화분 하나를 사다 주었다. 화분 안에는 파릇파릇한 코스모스 싹들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3~4일에 한번씩 물을 주면 잘 자란다는 큰딸의 당부가 고마웠다.
국화과에 속하는 한 해 살이 식물 코스모스는 신이 제일 처음 만든 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어딘가 가냘프고 흡족치 않게 보여, 이런저런 모양의 것으로 만들다 보니 기지각색의 꽃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코스모스가 가냘프면서도 맑은 인상을 주는 것은 고산식물인 까닭에 찬 공기와 맑은 기운을 받아 청초한 기품을 가지게 된 때문인 것 같다.
어릴 때 내 별명은 ‘코스모스’였다. 키가 크고 가냘퍼서 마치 코스모스를 보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런 유약함 때문에 얕잡아 보았는지 친구들은 가끔씩 나에게 지분거렸다.
14년 전, 3대 독자인 오빠가 세상을 떠나 서울엘 갔었다. 장례를 치른 후에 친족들이 모여 앉아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간호사인 셋째 조카가 남편에게 나의 결혼 전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고 한다. “우리 고모의 어릴 적 별명은 코스모스이고 얼굴은 영화배우 문희를 닮았다.”고 했단다. 문희라니,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난 후, 변화된 나를 만나보니 코스모스처럼 날씬하지도 않고 문희의 얼굴을 닮은 것도 아니어서 조카의 입장이 꽤나 난처했던 것 같았다. 나의 외모에 적잖이 실망한 모양이다.
“고모님이 어딜 문희를 닮았냐, 믿을 걸 믿으라고 해라.” 해서 두 내외가 다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준 동생과 한참을 웃었다. 안 닮아서 꽤나 미안했던 날이다. 살다보면 이렇듯 생각지 못한 일들로 부부가 언쟁을 벌일 때도 있다. 늘 외모에 신경을 써서 기대에 많이 어긋나지는 않았어야 했는데, 외모로 인해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나도 이제는 중년에 접어들었다. 가냘프던 코스모스는 모진 바람에 시달리며 억새풀로 변했다.
다인종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다보면 전쟁터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나를 억새풀로 만들어 놓았어도 좀도둑이 끓는 데는 당할 도리가 없다.
“당신이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이면 도둑을 맞느냐”고 남편은 나에게 핀잔을 준다. 구멍가게는 좀도둑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사방에 달린 거울로 수상한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도 한 순간을 놓치면 도둑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하루 12시간이상 노동을 하며 때로 이같은 말을 남편으로부터 들을 때면 섭섭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부부간에는 더 예민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비교적 유하다는 말을 듣는 나도 남편의 한마디에 예민한 반응을 하게 된다.
“남편씨, 집과 여자는 가꾸기 나름이란 말도 못 들어 보셨나요? 나도 옛날에는 코스모스과인 문희를 닮았다는 소리를 당신도 들었잖아요. 여자는 어떤 그릇에 담겨지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남편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으며 안쪽으로 사라진다.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가는 차 속에서 남편이 한마디했다.
“당신이 사실 문희 쪽은 아니잖아, 고두심이나 이태란 이라면 또 몰라도.” 말수 적은 남편이 갑작스레 꺼낸 말에 우린 차가 뒤집어지게 웃었다. 아마도 오늘은 자신이 준 핀잔에 적잖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TV 화면 안에 얼굴의 각도가 맞지 않아 카메라맨이 애를 먹는다는 중견 탤런트 K씨를 닮았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게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던가. 후한 점수를 주는 남편이 밉지 않은 날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난 코스모스를 보라. 결코 예쁘지는 않지만 가냘프고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에 친근감이 드는 꽃이다. 코스모스처럼 날씬했다는 걸 믿지 않아도 좋고, 얼굴이 바보 같아 보여 도둑을 맞는다고 해도 내 별명이 코스모스였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뒷마당 화분에서 피고 지는 코스모스를 볼 때마다 옛날, 가냘프던 시절의 내가 떠올라 한때나마 기분이 좋다.
내 별명은 ‘코스모스’, 나는 코스모스와 함께 오는 가을이 그래서 좋다. 봄이 오면 비좁은 화분에서 다퉈가며 피고 있는 코스모스를 마당에 옮겨 심어야겠다. 오늘 따라 하늘이 가을처럼 더 높이 올라가 있다.
김복희
약력: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크리스찬문협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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