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2월 올림픽가 코너에 한미은행이 자그마하게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이 은행이 10여년 후 미주 한인사회 최대 은행으로 발돋움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LA 한인사회에서 은행 하면 가주외환은행(CKB)이 전부였다.
초창기 한미은행을 세운 사람들은 정원훈 초대행장을 비롯 CKB 출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한인은행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소위 ‘한국식 관행’에 대한 염증이었다. 최고위직은 한국에서 파견 나와 현지 실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로컬 한인들의 승진을 가로 막으면서 차별하고 한국에 끈이 있는 인사들에 대한 ‘봐주기’가 횡행하는가 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반면 한미는 규모는 작았지만 한인사회에 뿌리를 박고 뭔가 새로운 은행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욕에 넘쳤다. 처음에는 새우와 고래 같던 한미와 CKB의 경쟁은 시간이 갈수록 다윗과 골리앗 싸움 양상을 보이더니 1998년에는 드디어 한미가 자산 규모에서 CKB를 뛰어넘고 한인사회 제1 은행으로 성장한다. 같은 해 퍼스트 글로벌 뱅크를 인수한 한미는 2004년에는 PUB로 이름을 바꾼 CKB까지 인수, 명실상부한 한인사회 대표 은행으로 우뚝 섰다.
이때까지 한미는 한인사회와 밀착하면서 한인 비즈니스 성장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한인 금융인들 훈련소 역할을 하며 한인 금융계 발전에도 큰 몫을 했다. 지금 LA 한인사회 주요 은행 행장을 비롯한 간부들 중 절대 다수가 한미 출신이다.
이런 한미가 요즘 흔들리고 있다. 지난 23일 한미은행 주가는 하루에 23%가 폭락했다. 연초 대비 불과 열달 사이 50% 이상이나 떨어진 것이다. 이날 주가 폭락의 계기가 된 것은 원래 25일 예정이던 3·4분기 실적 발표를 11월6일로 연기한다는 발표였다. 이렇게 된 것은 대출 손실이 예상보다 크게 나와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외부 감사기관으로부터 장부 기록의 사실 여부에 대한 승인을 받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로 인해 기관 투자가들로부터 한미 주식은 신뢰를 잃었고 가격에 관계없이 내다 파는 투매 현상이 빚어졌다. 한미 이사회가 2005년 1월 현 손성원 행장을 ‘모셔오면서’ 기대한 것은 미국 금융계를 잘 아는 손 행장을 통해 미국 투자가들의 관심과 돈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 손 행장 재임기간에 기관 투자가들의 탈출 러시가 발생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수익 악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한미뿐이 아니라 한인 은행 모두에 공통된 현상이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신용 경색이 주원인인 이 현상의 책임을 특정인에게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손 행장 체제의 한미가 난조라는 지적이 나온 지는 오래된다.
우선 손 행장 자신이 한인타운의 정서나 현실을 잘 모르는 데다 대출 전문가가 아니다. 그럴 때 행장을 보좌할 든든한 부하 직원들이라도 있으면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으련만 현재로서는 그런 안전장치가 없다는 것이 은행가의 중론이다. 이번 한미 수익 악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오클랜드 콘도 개발자금 융자나 저소득층 아파트 개발건만 해도 수천만달러씩 되는 융자 결정을 누구 책임 하에 내렸는지가 불분명한 상태다.
자유시장 경제 체제하에서는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 능력 있는 기업은 작게 출발해도 얼마든지 클 수 있는 반면 무능한 기업은 지금은 아무리 덩치가 크더라도 결국 문을 닫게 돼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한미와 CKB의 역사가 산 증거다. 이번 한미의 주가 폭락은 한미가 CKB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아니면 전열을 가다듬어 새 출발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경종이다.
한미는 아직까지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은행이다. 한미가 흔들리면 한인 은행가 전체가 흔들린다. 미국인 투자가들이 한미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여타 군소 은행들도 같은 대접을 받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미 이사회와 경영진은 이번 사태를 대오각성의 계기로 삼아 더 이상 한인사회를 실망시키지 않기 바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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