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유적지이며 잉카문명의 대명사 마추피추가 발아래 펼쳐진 풍경.
조상하 이사가 바닥에 펼친 보자기 위에 과자 몇 개를 놓고 장사하는 흉내를 내고 있다.
잃어버린 잉카 문명
마추피추에 그대로
6월6일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더운 세숫물을 16개의 통에다 떠 놓았다. 포터들의 정성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지 않게 했다.
중간 중간에 정글이 나왔다. 정글이라면 낮은 지대의 습한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발 3,000미터 이상의 높은 곳에도 정글이 있다니, 안개와 구름에 의해 생긴 정글이란다.
나무 둥치에도 파란 이끼가 끼어 있고 바위에 빽빽하니 붙은 노랗고 주황색의 이끼는 바다 속 바위에 붙은 말미잘을 보는 듯했다. 노란 야생란도 보였고, 여러 종류의 야생화가 많았다. 어제보다는 쉬운 코스라고 해서 별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돌계단이 무척 많아 나는 힘이 들었다. 수백개의 돌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올라가보니 조 이사님이 땅바닥에 빨간 보자기를 하나 펼쳐놓고 과자 몇 개를 두고는 양반다리 하고 앉아 “하나에 1 sol”이라고 외치면서 장사를 하고 계셨다. 조상하 이사의 재치에 우리는 배를 쥐고 웃었다. 잉카는 화폐와 문자가 없었다고 한다.
3,640미터인 곳(Phuyupatamarca)에서 점심을 먹었다. 마추피추 정상에 꽂힌 붉고 흰 깃발이 조그맣게 보였다. 아, 저 곳이구나. 이제 거의 다 왔구나.
오후 5시께, 3번째 캠프장(Winaywayna)에 도착했다. 이곳의 캠프장은 지난 이틀간 묵은 곳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어디서 갑자기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많아진 것일까? 잉카 트레일은 하루에 포터를 포함해서 모두 500명으로 입산을 제한한다고 들었는데.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우리처럼 3박4일 코스도 있지만 마추피추에서 해 뜨는 것을 보기 위한 1박2일 코스가 있단다. 쿠스코에서 기차로 와서 이곳 캠프장에서 자고 새벽에 마추피추로 가는 사람들이 묵는다고 했다. 이곳에는 식당도 있어 우리는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사흘의 갈증이 가시는 듯했다.
한국 - 페루 하나된 포터 작별식
오늘이 포터들과 보내는 마지막 밤, 식사 후 넓은 야외 홀에서 작별식을 가졌다. 맥주를 한 병씩 주고 그들에게 각각 30달러씩 주었다. 약 95sol, 학교 선생님 봉급이 한 달에 200sol이라니 95sol의 팁은 적은 돈이 아니리라. 그들 중의 한 명이 말했다. “고급 식당에서 ‘기니픽’을 먹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우리는 징그럽다고 안 먹고 거의 두고 온 것을 저들은 그렇게 맛있게 먹었구나. 우리는 함께 “Peru! Korea!”를 구호처럼 외쳤다. 그들이 합창을 했고 노래가 끝나자 우리에게도 노래 하나 부르란다. 아리랑을 부르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신나는 것이 좋겠다며 남행열차를 함께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도 헤어지기가 섭섭했다. 우리는 포터들 가운데 한 사람씩 들어가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하듯 빙빙 돌면서 “서편에 달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우리는 한 줄로 서서 그들과 한 사람씩 악수를 하고 허그해 주었다. 첫 날 그들이 버스에 탔을 때 우리의 비위를 거슬렀던 냄새가 허그하는 동안에 전혀 맡아지지가 않았다. 그냥 그들이 한없이 고마웠고 가여웠다. 왜 그리 가엾게 느껴졌을까? 우리의 기준으로 그들이 가엾다고 느끼는 걸까? 약국에 오는 수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떠올랐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미국의 환자들보다 이들은 과연 불행한 것일까?
6월7일 마추피추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 있는 체크 포인트는 아침 5시 반에 연다고 했다. 극성파인 우리는 30분 전에 도착하자는 의견을 모아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짐 챙기고 아침 먹고 서둘러 출발했다. 각자 헤드램프를 하나씩 쓰고 어둠 속을 걸어 5시쯤 체크 포인트에 도착했더니 약 50명이 우리 팀보다 먼저 와 줄서서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4시 기상 마추피추로
5시 반, 검사를 받은 후 약 1시간 걸린다는 선게이트를 향했다. 나무 냄새, 풀 냄새, 흙냄새, 새벽의 숲이 아침잠을 깨우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새벽 등산이 이렇게 좋구나.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마추피추가 나오겠지. 잉카 트레일을 위해 준비했던 일들, 못 해내면 어쩔까 걱정했던 일들, 지난 3일간의 산행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6시 반쯤 선게이트에 도착했다. 저편 아래 등선에서 세계 최고의 유적지인 마추피추의 전체 모습이 활짝 열렸다. 아, 드디어 다 왔구나. 산 중턱에는 마추피추로 올라가는 버스길이 지그재그로 그려져 있었고 맞은편의 산들은 몇 겹으로 쌓여 있었다. 산과 산 사이에는 새벽안개가 푸른빛을 발했고 안개 속에 숨겨진 산들과 숲들 속으로 나는 빨려 드는 듯했다.
우리는 마추피추의 맞은편 산에서 해 뜨기 전 내뿜는 광선을 쳐다보며 카메라 초점을 그 쪽으로 맞추었다. 저 곳에 해가 떠오르면 그 해는 마추피추를 비추겠지. 잉카 민족은 모든 마을과 제단을 동쪽을 향해, 태양을 향해 지어 놓았다니까. 해가 검은 실루엣으로 누워있는 산봉우리를 비집고 올라오자 우리는 환호를 지으며 제각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불가사의’잉카유적에 새삼 놀라
마추피추. 중학교 책에서 배웠던 잉카 문명의 대명사 마추피추. 그들은 왜 그렇게 높은 곳에 터를 닦았으며, 그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늘 궁금했던 노봉이라는 뜻의 마추피추. 돌을 정교히 깎아 이루어놓은 마을. 우리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돌과 돌 사이를 걸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방향을 제시하는 다이아몬드형의 큰 돌이었는데 가이드가 그 돌의 한 코너 위에 나침반을 얹으니 네 코너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나침반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잉카 민족의 천문학 우수성이 놀라웠다.
이곳은 스페인의 파괴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가이드 설명은 스페인이 쳐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잉카인들은 모두 이 곳을 떠났다고 한다. 계속 머물러 살면서 음식 하느라 불을 지펴 연기가 나고 사람이 사는 흔적을 보였다면 이곳도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1911년 빙햄 교수가 첫 발견
모두 떠난 후 수백년 동안 풀과 나무로 완전히 덮여 숨겨진 마을이 되었다가 1911년 빙햄 교수에 의해 발견이 되었다. 그들이 정밀하게 쌓아놓은 돌 제단도 어떤 곳은 돌과 돌 사이에 풀뿌리와 나무뿌리가 들어가 틈을 벌리고 뒤틀리게 한 곳도 있었으나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놓은 유물을 보러 세계 곳곳에서 오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달려야 하는 그들의 후손들, 방문객이 뿌리고 간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가이드에게 “너희 조상들이 얼마나 훌륭했고 지혜로웠는지 자긍심을 가져라”고 말해 주었다.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 시대에 그들 선조가 남긴 훌륭한 문화로 위로받게 해주고 싶었다.
입장료 75불인 마추피추에 며칠 머물면서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여행사 스케줄은 아쉽게도 불과 4시간 정도였다. 언제 내가 이 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 성 자
<약사·재미한인산악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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