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명분 확실한 의제를 확보한 민주당 주도 연방의회와 공화당 부시대통령의 힘겨루기가 ‘결전’을 한주 앞두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주 아동건강보험플랜(SCHIP)을 둘러 싼 한판 승부다. 연방 상하원이 지난달 통과시킨 건강보험 확대법안에 지난 주 부시가 거부권을 행사했고 그 거부권 뒤집기 표결이 다음 주 실시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산시키려면 상하원 각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상원에선 확보되었으나 하원에선 아직 부족하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공화당의원 14명의 마음만 돌릴 수 있다면 목표달성이 가능하다며 앞으로 한주일, 필사의 회유작전을 예고한다.
SCHIP 확대법안을 둘러싼 대립의 배경은 이념적 정치적 이견이 얽혀 복잡하지만 의외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건강관리를 반대합니까?’ 너무 표피적이지만 재선을 앞둔 정치가들로서는 무시하기 힘든 이슈다. 또 사실 그것 때문에 적지않은 공화당 의원들이 부시에게 등을 돌리고 이미 찬성표를 던졌다.
어제 뉴욕타임스가 소개한 12세 소년 그레임 프로스트의 증언도 감정적으로 치닫는 이번 대결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레임은 지난달 의회에서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여동생과 함께 SCHIP의 혜택을 받고 있다며 이 플랜의 확대 필요성을 호소했었다. 소년의 증언을 동정표 위한 민주당의 ‘동원작전’으로 간주한 공화당은 반격을 개시했다. 혜택을 남용하여 넉넉한 가정에서도 받고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프로스트 집안에 대한 뒷조사를 시킨 것이다. “아버지가 목재사업을 하며 비싼 사립학교에 다닌다더라. 40만달러짜리 집에 살고있는데 리모델링해서 부엌 카운터도 그래나이트 라더라…” 민주당도 증인 보호에 나섰다. “목재업은 몇년전에 폐업했고 지금은 용접공으로 부정기적으로 일하고 있다, 사립학교는 전액 장학금을 받아 다닌다, 90년에 5만여달러 주고 산 집의 시가는 26만달러고 부엌 카운터는 콘크리트다…”
사태를 파악한 공화당은 그쯤에서 공격을 접었지만 이미 상처입은 프로스트 가족은 분노를 누르며 항변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충실히 세금을 내며 사는 정직한 미국인입니다. 증언대에 선 것은 우리가 SCHIP으로 정말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을 다른 절박한 가정에게도 그 도움이 확대되기를 원해서입니다”
1997년 신설된 SCHIP은 원래 공화당의 작품이다. 당시 경기침체로 무보험인구가 급증하자 민주당의 클린턴대통령과 공화당의회가 초당적 합의에 의해 정부기금으로 마련한 저소득층 아동건강보험제도다. 빈곤층은 아니지만 개인보험은 들 여유가 없는 서민가정의 자녀들이 대상이다. 지난 9월말로 만료된 현행규정의 수혜대상은 4인가족 연소득이 연방빈곤 기준의 2배인 4만1,300달러이하다.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이 시행된다면 혜택대상은 현재 6백만명에서 1천만명으로 늘어난다. 연소득의 상한선도 6만1,950달러로 높아진다. 앞으로 5년간 6백억달러의 예산이 필요하다. 현행법에 의해 확보된 250억달러에 더해 350억달러를 마련해야 하는데 재원은 연방담배세 인상이다.
이 확대법안은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보험회사, 의사, 간호사들도 지지하고 민주당 뿐 아니라 공화당 유권자의 지지도 과반수를 넘었다. 그런데 인기가 바닥인 대통령이 ‘용감하게’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냉혹한 스크루지’라는 비난이 빗발치지만 부시의 거부권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시는 확대안 대신 50억달러만 더 지원하는 현행유지를 원한다. 그러나 그 정도 추가지원으로는 확대는커녕 기존 수혜아동중 1백만명이상이 탈락위기에 처하게 된다. 부시는 적자재정도 우려한다. 누군가 이런 계산을 했다 - “이라크에 쏟아붓는 경비의 41일분이면 미국의 가난한 아이들 1천만명의 건강을 1년동안 지켜줄 수 있다” 부시는 또 ‘넉넉한’ 중산층에게로까지 혜택이 남용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정말로 연수입 6만여달러면 4인가족 꾸려가기가 넉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리고 확대된다 해도 수혜아동의 78%는 저소득층에 속한다.
거부권을 행사하며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원칙이다” 이번 확대안이 미 의료제도의 ‘연방화’,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민 의료보험으로 가는 첫 단계가 될까봐 경계하는 것이다. 보수 대 진보의 이념 대결을 뜻한다. 물론 미국의 의료제도 개혁은 머지않아 반드시 이 대결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어떤 개혁을 이루든지 그에 앞서 격렬한 이념대결, 혹독한 정치투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더구나 가난한 아이들의 건강보험을 볼모로 이념투쟁을 벌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론 이번 확대안이 흠없이 완벽한 법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보험가정이 급증하는 현실에선 최선의 해결책중 하나다. 오는 18일 하원이 거부권 번복표결에서 이기기를 바란다. 보다 많은 공화당 의원들이 이념과 정치를 잠시 접어두고, 아프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배려를 먼저 생각해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박 록 /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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