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문자/수필가
===
74년 10월 말에 미국으로 이주하는 짐을 싸고 있을 때에 누군지 은근하게 나에게 물었다. 파티 드레스는 장만하시었나요? 아니요. 아니, 왜? 미국에 가신다면서.....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간 후에 우리는 실제로 이민 보따리에 파티 드레스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지니고 왔다는 한 여인 때문에 배꼽이 빠지도록 모두 웃었다. 우리가 모두 웃었던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당시에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드레스는 한번도 입혀지지 못하고 세월만 흘러갔기도 하였다. 서양영화에서나 보았던 그 시절의 댄스파티는 젊은 여인들에게 꿈같고 동화같은 장면이었는데, 우리가 살았던 한국을 벗어나기만 하면 언제나 댄스파티에 참석할 수가 있는 조건이 전개되리라는 순진한 상상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당시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미국인들조차도 영화에 나오는 장면과 같은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의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가 있는 장면. 연인들이 그윽한 분위기를 즐기며 경치도 훌륭한 곳에서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저녁을 먹는 모습이 이제는 전혀 낯선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야 특별한 날에나 일어나는 일이기는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끼리 모여서 남자들은 턱시도를, 여인들은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디너파티에 가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러 가기도 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상황은 비슷하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특수한 계층에서 있었던 일이 이제는 평준화가 되어서 누구나 형편에 맞기만 하다면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화한 오늘날에는 오히려 서구의 귀족사회에서 있었던 파티의 장면보다, 화려하기는 해도 훨씬 소박한 형식의 미국식 파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랫동안 왕들의 통치를 받았던 동양에서 이미 없어진 왕실에 대한 동경. 그것이 서양에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예전에 파티드레스를 막연하게 동경하였듯이 서양의 여자들의 왕실에 대한 동경의 태도는 아직도 진행이 되고 있는 듯하다. 10년 전에 세상을 뜬 다이아나 왕세자비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라든지, 그녀의 아들인 왕자들에 대한 관심이 식지도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아직도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본다. 아마도 그것은 어려서부터 읽으면서 상상하고, 영화에서 보았던 환상의 세계, 동화의 세계가 현대인의 머릿속에 아직도 깊게 자리잡고 있는 우리들의 꿈이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도 백화점의 드레스코너에 가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그것들을 구경하곤 한다. 그러한 감정은 아마도 아름다운 드레스가 주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고, 여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어떤 동경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파티드레스를 볼 때에 남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아직 나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라면 어린 아이라 할 지라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파티 드레스를 보고 있노라면, 미지에 대한 변함 없는 동경의 마음에 나의 생각도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민가정의 짐 속에 고이 간직된 파티드레스와 그 여인의 마음도 읽어진다. 비록 그것이 한번도 입혀지지 않았으며, 늘어난 체중으로 인해서 앞으로도 다시는 입혀지지 않는다 할 지라도, 그 마음은 언제나 소녀처럼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아름답다.
서양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왕실에 대한 동경과 동양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던 파티드레스에 대한 느낌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도, 때때로 백화점의 드레스코너에 들어서는 날이면, 아름답게 걸려있는 수많은 파티드레스 사이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들의 꿈에 대한 그림자인양, 옛 추억인양, 꿈결처럼 아늑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세월이 흐르는 소리. 또한 들려온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