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반세기(47년)를 살면서 일리노이 주립대학교(UIC) 교수로 활동했던 고동혜 박사가 이번에 동포사회에 또 모범을 보이고, 섭섭하게도 시카고를 떠난다.
우리 이민사회의 역사가 길어지자, 이렇게 시카고 올드타이머들이 하나 둘 씩 시카고를 떠나고 있다. 대개 은퇴 후 따뜻한 곳을 선호해 서부의 캘리포니아나 애리조나, 남부의 플로리다로 이사를 간다.
한인 최초의 약사로 이곳 약사회장을 역임하고, 최근 ‘31번째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자전적 소설을 쓴 이기춘 선생, 매년 동북아 정세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했던 eb페이지 대학 이병숙 교수(고 이항태 윌리엄스 대학 학장 부인), 아모코(AMOKO) 수석 부사장으로 극동 책임자였으며, 시카고 서울대 동창회장이었던 최일주 박사와 부인 김경숙 박사, 노스웨스턴 대학 박동환 교수, 소설가 민예영씨, 이민 소설 ‘억새 바람’의 작가 김유미씨, 엔지니어 안영기씨, 기아선상의 북한 동포를 위해 거액을 희사한 사업가 고 이종희씨 부인 이정숙씨. 이들은 모두 시카고에서 몇십년씩을 살면서 많은 활동을 통해 잘 알려진 인물로 이곳을 떠난 사람들이다.
이번에 건강상 이유로 고동혜 박사가 동생들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리스로 떠났다. 그곳으로 떠나기 며칠 전 고 박사는 자신의 모교 이화여자대학의 후배인 권오화, 강영희, 박연희씨와 문화회관 건립추진회 장기남 회장, 윤영식 이사를 쉐리단 자택으로 초대하여 1만달러를 건립 성금으로 써 달라고 흔쾌히 전달했다. 동포사회에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몸도 불편한 분이 떠날 때는 말없이 그냥 떠나도 될 터인데, 좋은 곳에 써 달라고 거금을 희사한 것이다. 노자에나 보태 쓰시지, 동포사회 미래를 걱정 하는 고 박사의 정성에 고개가 숙여진다. 고 박사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살던 집을 가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평소 큰 집을 갖고 싶다거나 돈을 벌겠다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가져보지 못하고, 평생을 학처럼 고고한 학자로 살아 왔다. 다만 한민족의 뿌리와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도 강해, 근검절약으로 모은 돈을 큰 목적을 위해서 나누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이런 인격은 그녀의 아버지 주요한씨로부터 배운 것 같다.
주요한씨는 자유당 시절 민주당 서울 중구 출신 국회의원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대한일보 회장을 역임한 언론인, 해운공사 사장과 상공부 장관을 거친 경제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분이다. 특별히 문인으로서 주요한은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문학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긴 시인이다, 서울 한복판 세종공원에 세워진 주요한의 시비에는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는 그의 작품 ‘빗소리’가 적혀있다.
몇년전 기자는 고동혜씨와 심층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고 박사는 “아버지는 일제 때도 자유당 때도 감옥을 가셨는데, 이광수와 함께 ‘친일파’이야기가 나와 변명도 못하겠어요”라고 안쓰러워하던 기억이 난다.
고 박사는 7년전(2000년) 아버지 주요한씨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주요한씨의 호를 따서 ‘송아 문학 연구소’를 세웠다. 만년에 그녀는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문학을 통해 자라는 2세들에게는 민족 주체성과 뿌리를 심어주고, 주류사회에는 ‘한국’을 알리는 일에 주력했다.
나는 얼마전 유기진 장로 90세 생일잔치에서 고 박사를 만났다. 깜짝 놀랐다. 평소 단아 하시던 분이 무척 여위시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했다. 78세의 나이에 비해 몸과 마음이 몹시 쇠잔해 보였다. 경기고녀 정구선수로 전국대회에 우승을 한 주동혜, 54년 미국에 유학을 와서 한인 여성 최초의 심리학 박사가 된 고동혜, 하바드 출신 남편 고순덕 박사와 심리학 분야의 태두로, 환상의 콤비라고 알려졌던 고동혜씨도 세월 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일찍이 1980년 고난경, 홍성옥, 정자선씨와 함께 시카고 여성회를 창설했다. 또 16년 전 여성회의 한 부서로서 여성코너를 마련하고 그 책임을 맡아, 방송을 통해 커뮤니티의 유익한 주제와 한미 가교의 역할을 하는 방송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이 지속되고 있다. 고 박사는 오랜 세월 정들었던 시카고를 떠나면서 동포사회 발전을 위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문화회관이 빨리 건립되기를 바란다는 부탁을 남겼다.
시카고 동포사회는 또 한분의 좋은 이웃을 잃었다. 바라기는 형제들과 외로움을 달래면서 기후가 좋은 곳에서 건강이 회복되어, 시카고에 문화회관이 탄생 할 때,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면 한다. 장도에 행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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