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세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의 하나다. 미국의 정치적 안정은 오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전통에 힘입은 바 크지만 현실적으로는 양당제의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는 조지 워싱턴이 초당적 합의에 의해 2번 임기를 마치고 낙향한 이래 지난 200여년간 양당제의 틀 속에서 이뤄져왔다. 내년 선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공화당 아니면 민주당이 이긴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다. 한국에서처럼 대선을 몇 달 앞두고 집권당이 간판을 여러 차례 갈아가며 후보를 뽑는 일은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이처럼 양당제가 확고히 자리 잡은 데는 승자가 그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하는 승자 독식주의(winner-take-all)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50개 주중 메인과 네브라스카를 제외한 48개 주가 이를 채택하고 있다. 이 제도 때문에 상당한 지지 세력이 있어도 제3당은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1992년 선거에서 독자 후보로 출마한 로스 페로는 전체 유권자 표의 19%(1,974만 표)를 얻고도 단 한 명의 선거인을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다.
이런 미 양당 제도의 최대 피해자는 자유당(Libertarian Party)이다. 1971년 12월 11일 발족한 이 정당은 20만 명의 등록 당원을 갖고 있고 다른 제3당 공직자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600명의 선거직 공직자를 배출했지만 정작 메인 게임인 연방 선거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자유당의 기본 강령은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우선 순위에 놓는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 개인의 어떤 행위도 정부는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따라 경제적으로는 시장 경제, 사회적으로는 민권 존중, 외교적으로는 불간섭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정부가 할 일은 치안과 국방, 판결 집행에 국한돼야 하며 동성애, 낙태, 총기 소유, 심지어는 마약과 매춘에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 작은 정부, 감세, 소셜 시큐리티와 웰페어의 민영화도 이들이 지지하는 이슈다.
언뜻 보면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보수주의를 결합한 공화당과 경제적 개입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를 혼합한 민주당의 주장 중 자유에 관한 부분만 떼어내 만든 것 같지만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개인 자유의 최대 보호’라는 논리의 일관성을 갖고 있으며 미국을 건국한 이들의 비전에 충실하다고 믿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의 힘은 별로 없지만 이들 생각에 공감하는 미국인들은 많다. 공화당 내 주요지지 세력 중 하나가 이런 성향을 갖고 있고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30대 젊은 층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다.
17일 일제히 서점에 깔린 ‘격변의 시대’(Age of Turbulence)를 쓴 앨런 그린스팬 전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도 그런 사람의 하나다. 그는 20년에 걸친 자신의 FRB 의장 재직 시절 이야기를 쓴 이 책을 소개하면서 자신을 “공화당 내 자유주의자”(a libertarian Republican)로 소개했다. 보통 ‘자유주의자’를 의미하는 “liberal” 대신 “libertarian”이란 단어를 쓴 것은 자신이 명색은 자유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지지하는 가짜 자유주의자가 아닌 ‘진정한 자유주의자’임을 밝히기 위해서 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자신은 공화당원이면서도 북미 자유무역 협정, 웰페어 개혁, 균형 예산을 통한 흑자 재정을 이룩한 민주당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고 의회의 방만한 예산 편성에 한 번도 비토 펜을 휘두르지 않은 현 부시 대통령에게는 낙제점을 줬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부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연방 상하원은 모두 공화당 장악 하에 있었고 작은 정부와 균형 예산, 세제 개혁과 소셜 시큐리티 민영화 등 레이건을 능가하는 업적을 이룰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집권 7년이 다 돼 가는 지금 부시가 남긴 것은 사상 최대 규모의 국채와 이라크라는 수렁뿐이다.
원칙을 저버린 공화당은 2006년 선거에서 참패했지만 그것이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는데 미국의 비극이 있다. 그린스팬은 “2008년 대선에서 자유 무역 협정에 적대적인 힐러리 클린턴이 집권할 경우 빌 클린턴 때보다 반시장적인 정책을 펼 것”이라며 미국 경제의 앞날을 우려했다. 넓은 미국에도 제대로 된 지도자 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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