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 <수필가/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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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생일카드가 왔다. “내 사랑 시몬시또(simonsitto) 안녕?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와이오밍에 사는 옛 직장상사의 부인 엘비라가 우리 큰아이에게 보낸 엽서다. 그녀는 갓 돌 지난 큰아이를 만나던 순간부터 꼬마 시몬이란 애칭으로 정을 담아 불렀다. 이제 그 아이가 30이 넘고 엘비라도 칠순이 되었지만 그녀의 사랑은 한 세대를 훌쩍 넘어 강물같이 흘러온 셈이다.
엘비라를 처음 만난 그해 겨울은 참 추웠다. 우리 가족 셋은 미네소타의 눈보라를 뚫고 직장을 따라 와이오밍으로 옮겨갔다. 대학원 공부가 끝난 직후의 첫 직장이 와이오밍 주 환경청이었다. 동양인도 없는 외딴 곳에다 보수적인 백인들 틈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주위에서 말렸다. 그러나 이왕 미국에 살기로 한 이상 한가운데 풍덩 뛰어들기로 했다. 산 영어와 문화를 빨리 익혀야겠다는 의욕도 앞섰다.
낡은 차에 세간을 싣고 소도시 샤이엔에 도착한 게 늦은 오후였다. 약속한 피자집 앞에서 나를 뽑아준 새 보스, 밥은 놀랍게도 꽃다발을 들고 서있었다. 훤칠한 키에 희끗해져 가는 백인 신사는 순박한 선교사처럼 보였다. 동양에서 막 도착한 여행객처럼 생경했을 나를 그는 환한 웃음으로 포옹하며 맞았다. 웰컴 투 와이오밍.
밥의 집은 언덕바지에 있는 아담한 렌치하우스였다. 행주치마를 두른 금발의 부인, 엘비라가 반갑게 뛰어나왔다. “아파트를 구할 때까지 우리랑 함께 지내요. 우리도 할머니랑 단출한 세 식구니까...??. 부엌에서는 구수한 찌개 냄새가 났다. 투박한 질그릇처럼 생긴 큰그릇에서 야채 스튜가 끓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나그네들을 대접한 스튜그릇일까? 그릇에는 주홍색 유약으로 쓴 글이 보였다. 웰컴 투 와이오밍.
엘비라는 추운 겨울엔 뜨거운 국이 좋다며 늘 스튜를 끓여주었다. 찌개를 좋아하던 우리식구에겐 참 고마운 일이었다. 살코기와 함께 토마토, 당근, 샐러리, 양파, 감자 같은 채소들을 풍성히 넣고 끓였다. 그리고 늘 따끈한 옥수수나 호밀 빵을 함께 구웠다. 그 스튜 내음은 고향 찌개 같아서 낯선 곳에서 시작하는 우리들의 불안한 마음을 훨씬 덜어주었다.
식사 후엔 밥은 작업복을 입고 차가운 차고 바닥에 누어 내 낡은 자동차를 수선했다. 고장이 잦아 거의 매일 정비를 해야했는데 밥은 엔지니어답게 꼼꼼히 설명해주며 고쳐나갔다.
몇 달이 지나자 밥은 나를 데리고 와이오밍 주 전체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70년대 말과 80년 초 당시, 미국은 오일파동으로 에너지 붐이 일던 때였다. 유전과 노천탄광, 우라늄광산이 산재한 와이오밍은 에너지 개발의 중심지였다. 세계굴지의 모빌, 엑손 같은 회사들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일거리를 좇아 수만 노무자들이 몰려들었다. 따라서 환경오염문제가 급속히 대두되기 시작했다. 환경청이 빠르게 팽창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 달에 반 이상이 출장이었다.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는 와이오밍의 투박하고 웅대한 자연미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황야의 황량함과 불모지의 메마름이 무척 낯설었지만, 봄의 빅혼 산맥, 여름의 옐로스톤, 겨울의 티톤 국립공원의 설원 속에 묻히면서 서부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경험하게 된 것이다. 쉐리단이란 산동네에서 벌어지는 로데오 경기장엔 현수막이 펄럭였다. 웰컴 투 와이오밍.
세월이 가면서 밥은 내게 훈련과 책임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그가 환경국장이 되면서 주를 사등분한 동북지방의 수질 관리 책임자로 나를 발령했다. 그 때 무엇보다 에너지회사들과의 수질 및 지하수오염 처리 시책들의 수립과 시행을 위해 머리가 빠질 만큼 고생했었다. 헌데 그 경험이 나중 캘리포니아로 직장을 옮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엘비라의 엽서를 받은 다음날 전화를 하였다.“엘비라, 지금도 그 야채스튜가 가끔 생각나요. 햇병아리 의사로 뛰고 있는 시몬시또도 당신의 그 유명한 스튜 맛을 꼭 보고싶어한답니다??엘비라의 웃는 소리가 옛날과 꼭 같다. 밥이 4년 전 세상 떠난 후 한번도 그 스튜를 끓여본 적이 없어요. 허나 시몬시또가 원한다면 내가 한번 끓일 수 있지??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웰컴 투 와이오밍 그릇을 꼭 쓰셔야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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