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사회가 부시대통령에게서 ‘배신감’을 느낀 것은 불과 2주전이었다. 보수우파의 기수였지만 어떤 리버럴 못지않게 친이민적이었으니까 기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포괄적인 개혁없이 단속강화만으로는 해결 못하는 것이 이민문제라고 강조한 장본인도 바로 부시 자신이었다. 그런 부시의 행정부가 비효율적, 비현실적, 비인도적인 불법체류자 단속강화안 시행을 발표한 것이다. 1,200만 불체자들은 물론 그들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는 업계까지 얼어붙게 한 그 조처에 실망하며 정권교체만이 살 길이라고 다짐한 유권자들이 한두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주말 부시 행정부는 또다시 서민층을 향해 찬물을 끼얹었다. 각 주에서 연방기금으로 운영되는 어린이의료보험 수혜대상 축소지침을 통보한 것이다. 수천수만명의 어린이가 무보험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연방 상하원은 지난 달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이 무료보험을 ‘빈민도 부자도 못된채 늘 쪼들리는’ 중산층에까지 확대하는 법안을 각각 통과시킨 바 있다. 9월초 의회가 다시 열리면 아마 절충안을 마련,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는 이미 보험에 들어있는 중산층 자녀들의 가입 취소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며 거부권 행사를 위협하고 있다. ‘철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서민층 어린이의 건강보다 보험회사의 이익에 더 관심을 가진듯한 대통령의 철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다음 선거 때까지 숙고해야할 과제다.
대선의 승패를 가르는 최대요소는 정권교체에 대한 필요성이다. 그 필요성이 국민의 마음속에 얼마나 강하게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여당과 야당의 판세가 좌우된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독재청산·민주화 등의 거대담론일 수도 있고 환경에 따라 이민단속·의료보험 같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이슈일 수도 있다.
정권을 바꿔보자는 갈망이 한국 국민의 가슴속에 가장 뜨겁게 끓어오른 것은 아마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였을 것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당시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한 구호가 그 갈망의 수위를 짐작하게 해준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 자유당 말기 가난에 찌들리고 부정부패에 짓눌렸던 국민의 한을 한마디로 대변했던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이 구호는 그러나 후보 신익희선생의 유세도중 급서로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20일 한나라당 경선에서 승리한 이명박씨의 후보수락 연설의 첫마디도 정권을 되찾겠다는 다짐이었고 앞서 2월 후보 출마를 발표했을 때의 회견문에도 ‘정권교체’란 말을 열두번이나 사용하며 그 필요성을 역설했었다.
선거는 게임이고 그중에서도 대선은 고도의 두뇌전쟁이다. 유권자의 감정코드를 건드리는 이미지나 이념 등의 적합한 사용이 치밀하게 계산되고 ‘검증’이란 단어도 마법의 지팡이처럼 요긴하게 휘둘러진다. 그러나 그 중간 중간에서 한두번쯤은 선택의 진짜 기준을 삼아야할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년이 채 가기도 전에 또 후회하기 십상이다.
한국대선의 키워드는 ‘경제’인듯하다. 한국 유권자뿐 아니라 미주한인 상당수까지 “이후보가 되면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후보 자신도 여권을 ‘서민 위한다는 정책으로 서민을 더 어렵게한 무능한 이념세력’으로 폄하하고 자신을 ‘유능한 정책세력’의 기수로 부각시킨다. 그렇다면 747구상이나 대운하 건설을 뼈대로 한 그의 경제공약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여권은 야권의 후보 확정과 동시에 ‘검증은 이제 시작’이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물론 재산을 둘러싼 의혹에 대한 검증을 뜻한다. 그러나 상대방 흠집내기에 앞서 검증의 진지한 잣대를 정책의 실현성에도 맞추어놓는다면,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정책을 명료하게 정리해 정권교체의 불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다면 유권자들의 이성적 선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전국을 뒤덮었던 당시 집권 자유당이 맞대응으로 내세운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였다. 한국대선까진 4개월, 미국대선까진 15개월이 남겨진 지금 이 시각의 양국의 민심은 확연히 ‘못살겠다…’에 기울어져 보인다. 양국의 여권이 나름대로 시도하고 있는 ‘갈아봤자…’가 아직 별 약효를 못내고 있다.
보수가 여당인 미국과 진보가 여당인 한국의 지난 5년간 여론의 변화양상이 대칭 닮은꼴인 것은 흥미롭다. 부시의 실정을 비판하는 미국의 여론은 눈에 띄게 좌향좌, 진보쪽으로 기울었고 노무현의 실정에 분노하는 한국의 여론은 우향우, 보수쪽으로 기울었다. 미국에선 ‘재정적자가 나더라도 정부가 저소득층을 돌보아야한다’는 의견이 절대적인데 반해 한국에선 ‘복지예산 늘일 필요가 없다’가 다수의 의견이 되었다. 앞으로 다시 5년이 지난다면 양국의 민심은 서로 방향을 바꿔 역류를 시작하고 있을까.
박 록 / 주 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